방글라데시 작가 무넴 와시프의 작품 ‘씨앗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는 짙푸른 바탕에 볍씨 몇 알을 흩뿌려 놓은 게 전부다. 파란색은 아이러니한 색이다. 우울과 외로움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희망을 상징하기도 하고, 차가운 느낌을 안기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심신이 편안해지는 따뜻함을 지녔다. 상실감을 느낄 때 찾게 되는데, 정작 마주하면 마음 한편에서부터 무언가 채워지는 치유의 기능도 한다. 여기에 쌀알들이 있으니 생명이나 순환 등을 말하는 것이리라 넘겨짚을 법하다.
하지만 작품 속 청색은 ‘인디고’를 의미한다. 쪽 또는 남(藍)이라 하여 사용되어 온 식물계의 천연염료다. 블루진(청바지)을 탄생시킨 주인공이다. 19세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세 계절 수확이 가능한 벵골 지역의 쌀 경작을 전면 금지한 뒤 인디고 재배를 강제로 확대했다. 이는 결국 대규모 기아를 불러 수많은 희생자를 낳는다. 슬픈 사연을 품은 작품이다. 식민지 역사와 방글라데시 국민의 기억에 대해 고찰하는 작가는 상처와 치유, 회복을 상징하는 볍씨로 정신과 문화를 강조한다. 쌀은 그에게 수확의 신이자 상서로운 의식의 고갱이다.
2018년 광주국제비엔날레에서 보았던 그의 작품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다. ‘자연에 대한 공상적 시나리오’라는 주제를 내걸고 내년 1월7일까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에서 연작 ‘씨앗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2’ 등을 볼 수 있다. 연약한 경계선을 이루는 씨앗의 배열 형태는 자연이 식민주의 착취와 폭력에 의한 파괴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일깨워 준다.
기후위기 인식의 전면화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영역에서 각종 친환경 정책이 펼쳐지고, 자연의 심미화를 동력 삼아 동시대 미술이 추구해야 할 ‘친환경’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답을 찾는 전시다.
북유럽 작가 킴 시몬손은 핀란드 숲, 스칸디나비아 민속과 대중문화, 종말론, 일본 만화와 비디오게임 등에서 받은 영감을 버무려, 기술 진보에 의한 문명 발전이 그려낸 동화 같은 세계 이면에 놓인 현대 사회의 갈등과 분쟁을 통찰한다. 실제 이끼가 덮인 듯 채도 높은 녹색 표피의 아이들로 이루어진 ‘이끼 인간’ 조각 시리즈는 세라믹 조각에 산업 섬유 기술을 접목한 작품이다. 예수와 잔 다르크, 우주비행사 등이 보인다. 이끼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땅, 바위, 나무를 에워싸 보호제 역할을 하듯이, 이들은 녹색 위장술로 자연과 동화됨으로써 스스로 신화가 되어야만 하는 우리 시대의 존재들을 은유한다.
버려진 액자와 지구본, 주사기, 청진기를 콜라주해 병든 지구를 형상화한 주재환의 작품 ‘22세기는 없다?’는 자연에 대한 일관된 무관심, 자연이 배제된 인간 중심의 환경 경제가 일상화한 현실을 풍자한다. 그의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는 계단 위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 남성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더 많은 소변을 뒤집어쓰는 형식은 기후위기 시대 더욱 첨예한 모습으로 여전히 계속되는 근대 계급 사회의 억압 구조를 비판하는 것이다.
방정아가 그린 ‘낙동강’은 환경 파괴에 대한 분노를 담은 작품이다. 수초 대신 쓰레기가 가득한 낙동강을 거니는 여공들의 모습을 투박하고 거칠게 묘사하며 낙동강의 수난사를 함축한다. 낙동강은 우리나라 근대화, 산업화, 경제 개발의 역사를 상징하지만 경상도 지역에 집중된 공단의 불완전한 폐수 처리 과정, 무분별하게 배출되는 오염수 탓에 악명 높은 수질 오염을 겪은 대표적 장소이기도 하다.
정철교의 ‘일광 칠암 전원마을’ ‘서생, 배꽃 필 무렵’ ‘고구마 밭’ 등의 작품은 일제히 신고리원자력발전소와 울산 서생의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툭 트인 바다와 양지바른 들판, 솔숲이 있는 천혜의 자연 환경 그리고 고리 원전과 송전탑. 자연 풍광과 위험하고 불안한 기운이 상존한다. 붉은 색조로 뒤덮인 야만적인 풍경화에는 이주와 보상, 평범한 일상에서 핵 위험의 잠재적 경계에 머물기를 요구받는 삶의 역설, 균열되고 고장 나 버린 현실 속 주민들이 체감하는 낯설고 이질적인 정서가 깃들어 있다.
출품작들은 공공 캠페인, 현장조사 및 여론조사, 사례분석, 기록과 협업 등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 생태학의 다양한 연구방법론을 미술의 지평에 적용해 환경 문제를 공적 사안으로 간주하며 그 실태를 미술관 안팎에서 공론화한다.
강승완 부산현대미술관 관장은 “전시를 통해 기후위기라는 전 지구 공통 과제를 직시해야 할 때”라면서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공생 입장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