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은 만만하게 오를 수 있다. 찔레순 따먹고 돌배 따먹으며 유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바친 뒷산, 같은 것은 내게 없다. 나의 뒷산은 지리산이었다. 어린아이란 모든 큰 것에 두려움과 경외를 느낀다. 마을 사랑방 노릇을 하던, 장정 두 사람이 안아도 팔이 닿지 않던 동네 초입 팽나무만 해도, 그것은 나무 이상의, 영(靈)이 서린 범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물며 산허리에 구름 감도는 지리산이라니. 그 구름 위에는 수염 허연 신선이라도 가부좌를 틀고 있을 듯했고, 그리하여 지리산은 무시무시했던 수십년 전의 역사를 거론할 것도 없이 그 크기만으로도 평범한 뒷산일 수 없었다.
지리산은 내게 오래도록 금단의 땅, 반역의 땅이었다. 그곳에는 내 부모의 청춘이 묻혀 있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던 우리네 슬픈 역사가 묻혀 있다. 지리산 어디를 가나 내 눈에는 부모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이 슬프고 잔혹한 풍경으로 떠오른다. 30여 차례 천왕봉에 올랐으면서도 야호, 한 번 시원하게 외쳐보지 못한 것은, 눈이 가슴까지 쌓인 한겨울, 버선도 없이 맨 발로 몇날며칠 불길 한 번 대보지 못한 솥단지를 머리에 이고 능선마다 까맣게 버티고 선 토벌대를 피해 숨죽이며 천왕봉 부근을 지났다는, 젊은 날의 어머니가 떠올라서였는지도 모른다. 지리산은 내 마음의 산이었고, 내 삶을 짓누르는 마음의 짐이었다.
내가 맨 처음 지리산을 찾은 여고시절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짜리 하숙집 딸까지 딸린, 경험자라고는 아무도 없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산행이었다. 노고단에서 하산하는 길에 하숙집 딸이 다리만 삐지 않았다면 누구나와 비슷한 평범한 첫 산행이었을 것이다. 아이를 업고 경사 급한 화엄사길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 나는 지도만 보고 당시에는 포장도 되어 있지 않고 찾는 사람도 없던 천은사 군사도로를 택했다. 아이 딸린 여고생들만 보내는 게 불안했던지 노고단에서 잠깐 말을 섞은 전북대생 셋도 우리를 따라왔다. 그들 역시 초보자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도 가도 허리께까지 잡초 무성한 길은 끝이 없었고, 간간이 소낙비가 퍼부었고, 등에 업힌 아이의 무게는 갈수록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싸구려 운동화 속에서 젖은 발이 아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