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가 자기의 계절을 사는 것 같아요. 자기의 그 계절들이 늘 충만하시기를.”
때맞춰 변화하며 옷 갈아입는 자연은 도시에도 그 충만한 기운을 채우고, 우리의 삶은 계절의 자연스럽고도 경이로운 흐름을 타고 나아간다. 짧은 프렐류드가 계절의 문을 열어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매 트랙마다 베를린의 도시와 자연에 깃든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담았다.
재즈 피아니스트 노성은. 어떤 사람들은 앨리스 스마일이라는 예명으로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다. 본인의 이름을 꺼내 대중 앞에 선 그녀는 분명한 목소리로 “‘베를린의 겨울’이 재즈라는 장르에서는 제 데뷔작인거죠”라고 말한다. 그녀를 재즈 아티스트의 프레임에 가둘 순 없다. 재즈는 그녀가 지금 쥐고 있는 것들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좋은 음악일 뿐이다. 손닿는 곳에서 제일 좋은 재료들을 골라,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요리사 같은 프로듀서. 그녀의 온몸에 깃들어있는 겸손함도 어느 작은 시골에서 덤덤히 맛을 지켜온 식당 주인장과 닮았다.
미국 버클리 음대 출신인 노성은은 루시드폴, 모멘시스 등 여러 뮤지션의 음반 및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했고, [아빠가 여자를 좋아해], [7급 공무원],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등 작품에서 영화음악 작업도 했다. 노성은만이 들려주는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소리가 있다. 그녀의 노래를 듣다 보면 한 번은 ‘노성은’이란 필터를 끼고 살아 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 분명 모든 면면이 영화의 컷처럼 아름답게 변해있을 것이다.
노성은은 음악에 있어선 융통성 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하는, 짝사랑에 가까운 음악들은 들을 맛이 난다.
-2012년 앨리스 스마일 1집이 나온 후, 2023년 노성은 1집까지 공백기가 길었어요. 이유가 있을까요?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백기가 생겼어요. 2012년까지는 한국에서도 음악 활동을 했는데, 이후 미국과 독일로 이민을 가게 되면서 예전처럼 활동하기가 어려워졌죠.
주 양육자면서 동시에 음악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재즈 뮤지션, 드물 거예요. 아이를 키우면서 음악을 한다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거죠. 아이를 양육하는 것과, 뮤지션으로서의 꿈을 펼치는 것. 두 가지를 양립할 수 있게 되기까지 이만큼 걸린 것 같아요. 이번 내한 공연도 큰 결심이 필요했어요. 남편이 아이를 돌보고 있거든요. 그래서 더 꿈만 같은 시간들이에요. 늦은 만큼, 더 열심히 해야죠.”
노성은은 2004년 버클리에서 주최한 오디션에서 한국 최고액을 받고 버클리로 유학을 간 수재다. 버클리 유학 시절 Performance를 전공하며 다양한 연주 활동을 벌이는 동시에 Music Synth 학과에서 장학금을 받아가며 신시사이저 장르도 공부했다. 그 노력이 고스란히 앨범으로 옮겨진 게 앨리스 스마일 1집 [여기서 사는 일]이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2년 반 동안 7학기로 복수전공을 마치며 매 학기 성적 우수자로 Dean's List에 오른 그녀는 버클리 최우수 졸업자가 되기도 했다.
-화려한 이력이 말해주듯, 노성은의 음악을 들으면 정말 기분 좋은 영리함이 느껴져요. 우수한 성적의 유지 비법은 타고난 재능일까요?
“저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정말 살려고 했어요.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땐 이미 남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을 때였고, 늦었기 때문에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돈 때문이기도 했어요. 장학금이나 이런 것들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윤여정 선생님의 인터뷰 답변이 떠올라요. 1년에 서너 편 다작을 했던 비법을 묻자 “애들 먹여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다. 닥치는 대로 했다”하고 하셨었죠. 저도 예술에 대한 모종의 환상이 있었나봐요. 훨씬 더 치열하고 현실적인 이유였네요. 그래도 완벽주의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절박한 마음만 가졌다고 그게 다 좋은 성과로 이어지진 않으니까요.
“맞아요. 좀 그런 성향이 있어요. 이번 앨범도 사실 완벽하게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에요. 코로나19 규제 때문에 전체 리허설이 불가능했어요. 리허설을 저랑 연주자들 몇명씩 다 따로 만나서 했고, 녹음날이 처음 다같이 모인날이 된 거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죠.”
-앨범을 보면 믹스 마스터 자리에 익숙한 이름이 보여요. 긱스의 강호정님이 맞나요?
“네 맞아요. 처음엔 ‘제 음악 괜찮은지 한 번만 들어봐주세요’ 하고 건넨 거였어요. 믹스를 오랫동안 혼자서 하다보니 확신이 사라져서, 다른 전문가의 조언이 정말 귀했거든요. 오빠가 쭉 들어보시고선 ‘내가 한 번 해볼게’ 하셨고, 열악한 녹음본들로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 내신 거예요. ‘곡이 너무 아까운데 녹음을 다시 좀 해보면 어때’ 하는 동료들 의견도 있었는데, 현실적으로 다시 연주자들을 모아서 재녹음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앨범이 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작업은 긴 시간을 갖고 천천히 진행됐어요. 몇 개월에 걸쳐서 한 곡, 한 곡씩 정리가 됐고... 그런 앨범이에요.”
-노성은님은 연주자의 사랑을 듬뿍 받는 연주자 같아요. 동료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느껴지는데요. 앨리스 스마일 앨범만 해도 고찬용(피쳐링), 함춘호(기타), 김정렬(베이스) 등 최고의 연주자들이 참여했어요. 본인이 루시드폴, 모멘시스 등 여러 뮤지션의 음반 및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고요.
“그러게요. 운이 좋은 것 같아요. 1집에 함께 했던 찬용 오빠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뮤지션이에요. ‘낯선 사람들’ 때부터 좋아했는데, 얼마 전에 새 앨범도 내셨죠. 너무 멋진 분이에요.
이번에 함께 서울에 오게 된 니오캣이라는 밴드의 리더이자 트럼페터 리사 북홀츠는 독일에서 Jazz Institute Berlin라는 학교를 다닐 때 만난 친구예요. 리사는 학생 대표였어요. 동양인에 나이도 많은 저에게 먼저 다가와 말도 걸어주고, 챙겨줬죠. 한국에 있는 대학교 어학연구소에서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을 정도로 한국에 애정을 갖고있는 친구예요. 저희 다 한국에서 연주를 하고 싶어 했는데, 리사가 지원한 펀딩 사업이 선정돼 이렇게 올 수 있었어요. 멤버들이 주는 기운들이 만만치 않아요. 평등하게 친구로 받아들여 주는 것도 고맙죠. 얼마 전에 한국 오락실에 갔는데, 애들이 저에게 동전을 주면서 ‘너도 게임 할래?’ 하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너무 좋고 재밌어요.
또 미국 버클리에서 유학할 때 만났던 친구가 이번 앨범 유통을 맡아준 소리의 나이테 음악회사 대표이자, 한국 1호 여성 재즈 베이시스트 송미호씨예요. 자연과 소리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음악인인데, 그녀의 회사명과 어울리게 제 이번 앨범명도 또 [베를린의 계절]이잖아요. 둘 다 ‘자연...! 너무 잘 맞네’ 생각했어요. 우연인 듯 필연 같은 만남들이 이어지면서 이렇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바웃 타임’이나 ‘이터널 선샤인’ 같은 영화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한국에서의 순간이 아주 다른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황홀한 꿈 같아요. 음악을 더 해야 한다고 모두가 다독여 주는 것만 같달까요.”
-이번 내한 여정을 함께한 팀 니오캣 얘기를 안 할 수 없어요.
“니오캣(Niokat)은 리더인 리사 북홀츠(트럼펫)가 이끄는 6인조 재즈 프로젝트 그룹이에요.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팀이죠. 니코 자이들러(테너 색소폰), 맥스 파이그(일렉 기타), 시드니 베어너(베이스), 요나스 메츠거(드럼) 그리고 한국인 피아니스트 노성은으로 구성되어있어요. 클래식 재즈 요소도 있고, 현대 음악 요소도 있는 컨템포러리 재즈팀이죠. 모든 멤버가 작편곡으로 참여하고 있고, 다들 능력이 출중해요. 같이 음악을 하며 많이 배우고 있어요. 리사(트럼펫)와 니코(테너 색소폰)는 이번 베를린의 계절 앨범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베를린의 계절], 이 앨범 얘기를 더 들어보고 싶어요.
“베를린에서 보낸 제 계절을 담고 있는 앨범이에요. 어떤 곡은 제 바닥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 어떤 곡은 또 이겨내고 올라오는 과정들을 담고 있기도 하고... 앨범명처럼 한국을 떠나 타지에서 살아낸 노성은의 시간들을 담았죠.
그 중에서도 마지막 곡 ‘나의 계절(Starting, Restarting)’은 삶의 여정을 계절에 빗대봤어요. 설렘으로 맞이한 계절. 그 속에서 자라고 모험하고... 그러다 길을 잃고 부서지기도 하지만, 모두 딛고 다시 삶의 새 계절로 걸어 나가는 이야기예요.
이 앨범 자체가 4명의 혼(Horn)과 4명의 리듬섹션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5번 트랙 ‘겨울’이라는 곡에만 비올라를 썼어요. 베를린의 겨울은 한국의 매서운 추위와는 조금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어둡고 차가운 긴 밤이 있어요. 사계절중 가장 긴 계절이기도 하죠. 혹독한 겨울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음악인 노성은의 꿈은 뭔가요.
“최근에야 비로소 제 자신을 음악가로 받아들이게 됐어요. 오랫동안 스스로를 음악가로 바라보지 못했거든요.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컸던 거죠. 이제 음악가로서의 제 정체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니, 들리는 소리들을 잘 듣고 써 내려가고 싶어요. 무엇보다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어떤 형태든, 장르든 상관없어요.
저 자신과 싸우지 않고 스스로에게 친절한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자신에게 가혹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음악이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걸 믿기로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가족과 빛나는 순간들을 잘 누리는 음악가이고 싶어요. 너무 판타지 같을지 모르지만, 아내·엄마라는 제 역할과 음악가라는 제 직업이 더 이상 싸우지 않기를 바라요. 각각의 기쁨을 날라다 주면서 지내고 싶어요. 음악으로 힘 얻어서 엄마로서도 행복해지고, 아이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영감도 얻고요.”
정점이랄 것 없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자연처럼, 이 앨범의 계절들 역시 그 자체로 정점이고 또 시작이다. 이 음악들이 가진 편안함에 기대, 온 마음을 다 풀어헤친 후에야 쏟아져 나온 내밀한 감정들. 어떤 행복들은 매우 침착히 빛났고, 어떤 슬픔은 너무 진솔해서 눈에 띄었다. 그녀를 껴안아 주려다, 나를 껴안는 여유가 만들어지는 마법이 벌어졌다.
누군가는 본인의 색이 빨간색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보라색이라 말한다. 그들은 그걸 말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가진 색깔보단, 그 사람의 확신이 좀 부러울 때가 있다. 그럼 노성은은 무슨 색인가. 난 그녀가 ‘투명색’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물방울 같은 거다. 맑고, 진실하고, 무엇보다 다양한 색을 품고 있는. 그러니 그녀를 한 가지 색으로 규정하는 일 따윈 부질없다. 자연은 늘 오만가지 색을 품고 있다.
초음파가 사람 귀에 들리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청력으로는 들을 수 없는 너무도 큰 소리이기 때문이다. 자외선이 보이지 않는 이유도 마찬가지. 우리의 시력으로는 볼 수 없는 강한 빛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큰 것들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다. 내가 작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 틀리는 이유, 감각을 너무 과신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린 때때로 슬픔의 최전선에 있다. 오늘 스치고 간 슬픔이 어느 정도의 강도를 지닌 건지, 곱씹어 볼 틈도 없이 그때 그때 견디고 잊어버려 모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녀의 음악이 어떤 이의 마음에 들어가 삼켰던 기억을 멋대로 끄집어내는 만행을 벌이는 상상을 해본다.
‘신이 쉼표를 찍은 일에 멋대로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류시화 시인의 책이 있다. 마침표를 찍었다고 믿었지만, 아직 살아 숨 쉬는 마음 속 쉼표는 몇 개일까. 사라지지 않았지만, 또 소리 내지 않던 어느 날로부터... 모두가 꼭 초대받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