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허보리는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 주어진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느질과 자수를 사용한 설치작업, 또는 사물을 의인화해 스토리텔링을 부여한 회화 등의 방법으로 표현해 왔다. 최근 그의 회화는 계절에 따라 순환하는 식물세계를 인간 삶을 은유하는 모티브로 제시한다. 서로 엉키며 군락을 이룬 식물의 풍경은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군중의 삶과 닮았다. 작가에게는 고단한 삶의 쳇바퀴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도피의 공간이기도 하다.
12월2일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71길 갤러리 플래닛에서 ‘채집자’란 간판을 내건 그의 전시회가 열린다. ‘장미극장2’, ‘메밀추상’, ‘Tower(타워)’ 등 30여점의 회화와 드로잉 작품이 포진했다.
작가는 이번 개인전에서 자신의 작품활동을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며 도피의 우물을 파는 행위와 우물 밖 세계를 관찰하는 행위로 나눈다. 두 활동은 다른 양상이지만 작가는 각각의 활동에서 ‘채집자’가 된다.
‘장미극장2’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건초더미’를 오마주한 작품이다. 쓸데없는 사물에 매달리는 사람들의 현실을 유희적으로 풍자한다. 작가는 보스의 원작에서 건초더미를 개털로, 신의 자리를 개로 대체해 정치가, 노동자, 군인 등 여러 사람이 개털을 집어 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과 이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개의 모습을 담았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채집자인 해녀의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내부로의 침잠과 외부의 관찰이라는 채집의 두 행위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세계와 외부세계 사이의 균형을 잡아간다.
허보리는 서울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통인화랑, 가나아트파크 등에서 15회 개인전을 가졌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셀트리온, 태성문화재단 등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