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중공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휘하 부대원들의 크나큰 희생에 죄책감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용호(1929∼1952) 해병 중위가 전쟁기념사업회에 의해 ‘이달(11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4일 사업회에 따르면 김 중위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9월 함경남도 원산부(현 북한 강원도 원산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6월 해병학교에 들어가 훈련을 받고 1952년 3월 소위(해병 간부후보생 제7기)로 임관했다. 당시는 전쟁의 양상이 38선 부근에 형성된 전선을 따라 치열한 고지 쟁탈전으로 바뀐 시기였다.
김 소위는 경기 북부 장단지구 방어 임무를 수행 중이던 해병 제1전투단 11중대 3소대장으로 부임했다. 장단지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전선에 해당했다. 따라서 이 지역을 확보하려는 우리 해병대와 중공군이 1952년 3월부터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김 소위는 장단지구의 최전방 전초기지인 33진지에서 휘하 소대원들을 독려하며 방어 임무에 매진했다.
이윽고 중공군이 2개 중대 병력을 동원해 포격을 앞세우며 33진지를 공격했다. 우리 해병대는 적의 공세를 저지하고자 백병전까지 감행했다. 김 소위는 ‘나가자 해병대’ 군가를 부르게 하는 등 대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김 소위가 이끄는 3소대는 결국 중공군의 33진지 장악 시도를 성공적으로 무산시켰다. 국가보훈부는 지난 2021년 4월 김 소위를 ‘이달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하며 “병력 및 화력의 열세로 적이 끝내 진지에 난입하자 죽음을 무릅쓰고 아군에 진지 내 사격을 요청하는 등 사투를 벌인 끝에 중공군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뒀다”고 그의 전공을 소개했다.
하지만 아군의 인명피해도 엄청났다. 소대원 중 70명이 전사하고 단 4명만 살아 남은 참혹한 모습에 김 소위는 큰 충격과 더불어 극심한 자책감을 느꼈다. 안타깝게도 그는 전장에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유서엔 ‘소대원을 모두 잃은 데 대하며 무한한 자책을 금치 못한다’ ‘소대원이 잠든 이 고지에서 죽음을 같이하고 속죄하려 한다’ 등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정부는 장단지구 전투에서 김 소위가 세운 전공을 평가해 그에게 중위로의 1계급 특진과 더불어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고인의 유해는 1959년 11월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제19묘역에 안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