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의 아이콘, 엄마의 정성과 손맛…. 입맛이 없거나 시간에 쫓길 때면 김밥 한 줄 둘둘 말아 한 끼를 해결하곤 했다. 이처럼 너무도 친근하고 간단히 만들 수 있는 탓에 김밥은 오히려 은근히 저평가 되어온 한식이다.
이러한 김밥으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락셰프(김락훈·53)의 꿈이 그 영역을 빠르게 넓혀가고 있다. 그가 개발한 ‘삭힌홍어김밥’은 이미 스페인 등 유럽에서 인기다.
“단무지, 계란, 게맛살을 넣어 싼 것만 김밥이란 생각부터 버려야 해요. 달리 보고 틀을 깨면 새 길이 열립니다. 삭힌 정어리를 먹는 외국인들도 많거든요. 스페인 재료를 넣으면 스페인 김밥, 미국 재료로 싸면 미국 김밥이 되는 겁니다.”
팬더, 고래, 게, 나비, 잠자리 그림이 나타나도록 만 캐릭터 김밥부터 색깔 옷을 입은 김밥까지 다양한 걸작품을 내놓았다. 일식과 중식이 자리 잡은 세계무대에서 시선을 잡을 ‘한 방’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비빔밥과 불고기가 선전하고 있지만 중식과 일식, 동남아 음식의 독특한 식재료와 향에 밀려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어요. 맛뿐 아니라 눈으로도 즐기는 음식으로 경쟁력을 가져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마치 파티를 벌이듯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재미있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한국의 음식문화와 밥상머리예절까지 배우게 되는 ‘파티김밥’을 탄생시켰다.
“김밥을 마는 일은 무척 단순하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벼를 키우는 농부의 정성, 김을 양식하는 어부의 노동, 김밥을 마는 엄마의 정성이 가득합니다.”
그는 2014년 두 달 동안 혼자 우리 땅 해안선을 따라 포구 기행을 다녀왔다. 마흔다섯 나이에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때 얻은 결론이 ‘파티김밥’이었다.
“나만의 개성을 갖춘 셰프가 되기로 마음먹고 고민해 얻은 답이 ‘아이들과 김밥 말면서 노는 락셰프’였어요.”
그는 수많은 국제 무대에서 ‘락셰프의 쿠킹클래스’라는 김밥쇼를 선보이며 스시보다 우월한 김밥의 우수성을 알렸다. 그의 쿠킹클래스는 최초로 미국 공립학교에 진출해 대한민국 김과 쌀의 역사 등 한국문화와 함께 인성교육까지 전파했다.
현지에서는 “그가 만든 아름다운 김밥은 창의적이며, 에너지와 활력을 주는 강력한 도구”라는 평가를 매겼다. 이후 스페인, 독일, 프랑스, 영국에 이어 유엔과 브라질에서도 김밥 쿠킹클래스가 진행됐다.
락셰프는 유독 해외에서 강한 이유에 대해 ‘소통과 공감을 살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일반 참가자들이 직접 만들어 시식하는 참여형 진행이 통했어요. 김밥을 만드는 동안 한식을 이해하고 경험하기 때문에 호응도가 높았습니다. 이제 ‘파티김밥’은 놀이를 넘어 각종 리더십프로그램으로 확장해 어린이가 중심이 되는 화목한 가족, 직장 상하관계 커뮤니케이션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역할까지 하고 있어요.”
그의 김밥에 대한 믿음과 사명감은 훨씬 단단하고 진지하다. 각 분야 전문가들을 모아 음식뿐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깊이를 추구하는 ‘대한민국김밥포럼’을 출범시켰다. 김밥의 새로운 가치창조와 세계화 추진 지원정책을 마련하기 위한 국회토론회와 국제 세미나 등을 열어오고 있다. 지난달 5일에는 스페인 도노스티아·산세바스찬에서 열린 유엔 세계관광기구(WTO) 포럼에 연사로 참석했다. 한국인이 연사로 나선 것은 처음이다.
락셰프와 김밥의 인연은 1995년 대학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떠난 유럽 무전여행에서 맺어진다.
“런던에 있는 일본식당에서 주방보조로 일한 적이 있는데 우리 김밥을 일본 음식으로 알더라고요. 그게 참 속상했어요. 일본 스시처럼 김밥도 세계 음식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오기 같은 강한 결심을 하게 됐죠.”
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은 물론 동구권까지 두루 돌아다니며 1년을 보낸 그는 일본으로 날아가 라면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6개월을 지냈다. 이후 미국 로스앤젤레스행을 택했다가 뉴욕에서 초밥집 일을 봤다. 서울로 돌아오니 2년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무전여행은 그에게 든든한 배짱을 키워 주었다. 남은 1학기를 마치고 취업했다. 1998년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으로 어수선했지만 외국계 회사에서 러브콜을 받았다.
다양한 일을 경험했다. 인터넷 서비스, 엔지니어링 회사를 비롯해 디자인, 마케팅, 심지어 불화(佛畵)를 그리는 종교미술사, 골프장 건설 파이낸싱 회사도 다녔다. 김밥과는 연관이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지내다가는 아내와 딸아이를 데리고 잘 살아내기 힘들겠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평생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어요. 무전여행 때의 김밥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러나 발레 강사를 하던 아내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라고 권했다. 그는 한 발 물러서는 것처럼 속을 감추곤 독학으로 사케 소믈리에 ‘기키자케시’ 자격증을 따냈다. 이어 한식부터 양식·중식·일식·복어·제과·제빵·조주사까지 국가 공인 요리사 자격증을 모두 취득했다.
2011년 아내를 설득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스시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꿈에 젖어 있었죠.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집니다. 함께 공부하던 이들이 모두 일본을 떠났어요. 부모님도 귀국해라 난리가 났죠.”
날마다 눈물로 돌아가자는 아내의 요구를 들어 귀국했다. 그러나 하룻밤 묵고 나서 다음 날 곧장 도쿄로 되돌아갔다. 이 대목에서 수많은 유부남들이 탄성을 터뜨리고야 만다. 어떻게 ‘마눌님’과 부모님 뜻을 거역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야말로 ‘꺾이지 않는 마음’이었다. 그만큼 그는 스스로 독해질 수밖에 없었다. 스시 3급, 2급, 1급과 일본주품질감정사 등 관련 자격증을 모두 휩쓸고 돌아왔다.
“첫 손님을 모시는 마음으로 아내에게 스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초밥을 입에 물고 눈물을 흘리던 아내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내의 고생은 이 순간 끝이라고 맹세했단다.
전국 대회 등에 참가해 수상의 기쁨을 맛보던 그는 ‘요리대회의 월드컵’이라 불리는 ‘2014 룩셈부르크 요리월드컵’에 국가대표로 나가 단체전 동메달과 개인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저는 하고 싶은 일을 찾았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날마다 일 생각을 하면 설레거든요.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을 쌓아서 그것들이 자신의 일을 빛내도록 해야 해요. 요리사의 기능적 역할만 들여다보지 말고 식감과 미감을 충족시키는 방법 등을 연구하거나 새로운 식재료를 찾는 등 늘 시도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셰프가 장래 희망인 아이들이 많다. 진학지도에 대한 조언은 어떨까.
“학교 공부부터 열심히 해야 해요. 요리학원을 다니며 만들기만 배우면 ‘기능’이 뛰어난 요리사가 될 수 있어도 생명 없는 요리를 내놓게 되기 때문이죠. 인문학을 익혀야 해요. 인성과 체력을 다지고 문화·예술 안목을 갖춘 뒤 요리를 시작해도 결코 늦지 않거든요.”
그는 ‘퇴직하면 김밥집이나 차려야겠다’가 아닌 자부심이 충만한 김밥집들이 우뚝 들어서길 원한다.
사실 김과 쌀을 즐기는 국가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서양인들은 비릿한 김을 참아내기 어렵고 쌀보다는 밀을 주식으로 삼아왔다. 락셰프는 김의 비릿함을 밥으로 잡아내고 고소함을 유지했다. 어떻게 밥을 짓느냐에 비책이 숨어 있다.
“김과 쌀을 안 먹던 그들도 이제는 김밥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햄버거 대신 김밥을 주문하는 모습을 흔히 보는 날이 곧 올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