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억류' 한국케미호, 정부 상대로 항소심 본격화 [법조 인앤아웃]

국가의 국민 보호책임은 어디까지

법원"국가 배상 책임 없다"
디엠쉽핑, 1심 패소 후 항소

2021년 1월4일 호르무즈 해협 인근 해역을 항해하던 한국케미호가 이란에 나포됐다. 당시 선박에는 한국인 5명, 미얀마인 11명, 인도네시아인 2명, 베트남인 2명 등 선원 20명이 타고 있었다.

 

이란측은 한국케미호가 해양오염을 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일각에서는 미국의 제재로 한국에 동결된 이란 원화자금에 대한 불만이 한국케미호 나포의 주된 이유라는 분석이 나왔다. 나포 사건 다음날 이란 정부 대변인은 이란의 선박 나포가 인질극에 해당한다는 비판에 대해 “이란 자금 70억 달러를 인질로 잡고 있는 것은 한국”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지난 2021년 1월 4일 호르무즈 해협의 오만 인근 해역에서 항해 중이던 석유화학물질 운반선 한국케미호가 이란 혁명 수비대에 의해 나포되고 있다. AP연합뉴스

‘한국케미호 나포사건’은 현재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해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한국케미호 선주회사인 디엠쉽핑 측은 나포부터 석방까지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디엠쉽핑의 김영민 이사는 7일 기자와 만나 “일반적으로 해양오염 사고였다면 해경에 해당하는 기관이 나오는 게 상식적”이라며 “그런데 공격용 헬기부터 군함 등 군대가 동원돼 선박을 나포했다. 선박의 과실이 아니라 국가간 정치적 이유 때문에 피해를 본 것”이라고 말했다.

 

디엠쉽핑은 선주상호보험(P&I)에 가입돼 있어 회사의 과실로 인한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다. 따라서 실제로 한국케미호가 해양오염을 일으켰다면 P&I에서 이란에 합의금을 지급하고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디엠쉽핑 측에 따르면 P&I는 한국케미호의 과실로 해양오염이 일어났다는 증거가 없고 나포 사건이 정치적 문제로 보인다는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부했다.

 

디엠쉽핑은 당시 선박 석방을 위해 외교부 주관 하에 이란과 교섭했다. 디엠쉽핑의 곽민옥 대표와 김 이사는 이란 현지를 직접 방문해 협상에 참여했다. 곽 대표는 “처음에 이란이 1700만 달러, 약 200억 가까이를 요구했다”며 “받아들일 수 없어 오염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니 보여주지 못했다. 이란이 해양오염 조사에도 나서지 않아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김 이사는 “협상도 이상하게 진행됐다. 둘째날에는 첫째날보다 금액이 절반 떨어졌다. 그 다음날에는 또 절반 줄인 금액을 제시하며 서명만 하라고 요구했다”며 “한국으로 돌아와 이란 대사관을 통해 협상할 땐 20만 달러까지 금액이 내려왔다”고 주장했다.

 

이란 외무부는 선박 나포 29일만에 선원 19명을 석방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선박과 선장은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란에 계속 억류됐다. 이후 정부는 이란과 협상을 이어가 디엠쉽핑이 10만 달러(한화 약 1억원)를 이란에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고 선장과 선박까지 풀려났다.

지난 2021년 1월 5일 부산에 위치한 한국케미 선박 관리회사에서 직원 등이 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부산=연합뉴스

디엠쉽핑 측은 같은해 9월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냈다. 디엠쉽핑 측은 국가가 호르무즈 해협 항해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예방 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점과 억류 상태를 방치한 점, 합의 과정에서 허위로 해양오염을 자백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또 이 같은 불법행위가 인정되지 않더라도 정부가 미국의 대이란 경제 제재 조치에 동참해 선박 나포까지 이어진 것이라며 손실을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민사20부(재판장 이세라)는 지난 5월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공무원의 행위를 원인으로 한 국가배상책임은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때’라는 요건이 인정돼야 한다는 점을 짚었다. 재판부는 “정부가 디엠쉽핑 측의 의사에 반하여 허위로 해양오염을 발생시켰다고 자백하도록 했다는 객관적 자료가 없다”고 봤다. 이어 정부가 2020년 1월부터 호르무즈 해협 인근을 항해하는 선박들에 안전가이드라인을 배포하고 지속적으로 선박들을 모니터링 하며 안전을 확인한 것을 두고 “국가가 보호의무를 게을리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억류 상태를 방치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당시 정부가 지속적으로 이란 정부와 외교적 협의를 진행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국가가 보호조치를 충분히 했다고 봤다.

사진=뉴시스

디엠쉽핑 측은 이에 불복해 지난 6월 항소했다. 소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로백스 측은 “이란도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해양오염은 사실상 없었다고 전제해야 한다”며 “그렇다면 사실상 국민이 해외에서 범죄 행위를 당한 것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단순히 외교적 협의를 돕는 수준이 아닌 국가가 더 적극적으로 관여했어야 한다고 본다”고 밝혔다.

 

곽 대표는 “회사가 잘못이 없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다”면서 “결과적으로 정치적 이유 때문에 회사만 이란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했는데 국가가 인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서울고법 민사19-3부(재판장 배용준) 심리로 열리는 다음 항소심 재판은 8일 열린다. 디엠쉽핑 측은 위급 상황에서 외교부의 자국민 보호조치와 관련한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했다. 관련 지침을 확인해 보호조치가 매뉴얼대로 충분히 이뤄졌는지를 보겠다는 취지다. 이날 재판에선 문서 제출 명령에 대한 심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