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가 굽나 봐. 누가 그러는데 내가 걸을 때 엉덩이가 뒤로 나온대.” “안 좋은 신호네요. 처음 그렇게 시작되거든요.”
지난 7일 찾은 강원 춘천시 동면 신이리의 한 농가. 김순금(70·여)씨와 거실에 마주 앉은 양창모 호호방문진료센터 원장이 건강 상담을 시작했다.
양 원장은 그에게 “농사일을 하루 몇 시간이나 하느냐. 어제는 무슨 작업을 했느냐”고 물으며 노트북 컴퓨터를 뒤져 영상 하나를 띄웠다. 운동치료 영상이었다. 그는 “허리 굽는 건 금방이라서 지금부터 예방 운동을 해야 한다”며 영상에서 김씨에게 맞는 3가지 운동법을 소개했다.
다시 김씨가 양 원장에게 “손가락이 안 구부러진다. 마디가 부어 있다”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양 원장은 “‘방아쇠 손’이라고 한다. 손을 많이 쓰니까 이렇다. 아무리 주사를 맞아도 일 안 하는 것보단 못하다. 농사를 줄여야 하는데 안 되면 호미질할 때 손잡이가 두꺼운 호미를 써라”고 조언했다.
이날 양 원장은 허리 통증에 시달리는 부부에 시술하기 위해 왔다. 병원 같았으면 바로 관련 증상에 관한 짧은 대화가 이어진 뒤 처방이나 치료가 시작됐겠지만 이곳 분위기는 달랐다. 양 원장은 우선 환자의 말을 들었다. 대화가 농담 등으로 이리저리 튀는데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중간중간 ‘음’, ‘음’ 하며 호응하며 계속해서 더 많은 말을 꺼내게 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처음 피웠다는 난로에서 퍼지는 훈기에 나른함마저 느껴졌다. 일반 병원 진료실의 차가운 긴장감은 없었다.
한참 대화 뒤 진료 기록을 다시 확인한 양 원장은 “허리 치료한 지 오래되셨네. 오늘 주사 맞으셔야 할 것 같으냐”고 물었다. “네”라고 김씨가 답하자 “알겠다”고 하며 주사 놓을 준비를 했다. 치료에 대한 결정권도 의사가 아닌 환자에게 있었다.
양 원장은 이어 민씨 손을 잡고 “손 시린 건 어떠냐”고 했다. “여전하다”는 그에게 “병원 가보시라는데 1년이 다 되도록 왜 안 가시냐”고 물었다. “이상한 소리 할까 무서워서…”라며 민씨가 말끝을 흐렸다. 양 원장은 “그런 건 나도 무섭다. 그래도 한 번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안심시켰다. “혈류가 안 통하는 게 문제”라며 금연치료도 권했다.
이후로도 동네 주민들 이야기와 최근 근처 산에서 불난 이야기 등 대화가 이어졌고 그제야 부부는 안방에서 허리주사를 맞았다. 부부 진료에 거의 1시간이 걸렸다.
양 원장이 이 일을 하기 전 시내 병원에서 봉직의로 일했을 때 재본 환자 1인 진료시간이 6분이었다고 했다. 병원 측으로부터 그 시간도 줄여달라는 압력을 받았단다.
컨베이어벨트 같은 이 진료 시스템을 그는 ‘마치 오디션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짧은 순간 환자는 지난번 진료와 이번 진료 두 달 사이 있었던 것을 다 전해야 하고 의사 역시 그 짧은 시간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는 오디션 장면은 이날 동행 취재 현장에 없었다.
민씨는 방문진료가 “좋다”고 했다. “한번 나가려면 배 타고 차 타고 하루를 다 써야 하는데 그 먼 길을 역으로 찾아와 주는 의사가 세상에 어딨느냐”면서 말이다.
이 마을은 수몰지구에 있다. 50년 전 소양강댐이 건설되면서 마을 아래가 물에 잠겼다. 그때 길이 끊겼다. 오전 진료를 마치고 자동차로 한적한 산길을 40여분을 달려 와 보니 정말 길이 뚝 끊겨 있었다. 원래는 마을까지 들어오는 길이 있다. 댐은 보통 장마철부터 겨울 농한기까지 물을 채운 뒤 봄이 되면 방류해 다시 물그릇을 키우는 패턴을 반복한다. 마을로 연결되는 길은 방류 기간 잠깐 드러난다. 다른 때에는 물이 찬 곳이 선착장이 되어 주민들은 각자 가진 소형 FRP보트로 이동한다.
호호센터는 수몰지구에 있는 춘천시 5개면, 30개리에서 방문진료를 한다. 수몰지구는 댐에서 반경 5㎞ 이내다. 언뜻 계산해보니 주민 3만여명, 그중 노령인구가 6000여명이라고 센터 측은 전했다. 이들 중 센터가 서비스를 제공한 이는 연간 150여명 정도다.
이어 방문한 한금자(80)씨 집. 양 원장 일행은 문을 열고 제집인 양 들어가며 주인을 찾았다. 양 원장을 보자마자 한씨는 14일 동안 앓았다고 하소연했다. 독감에 걸렸던 것이다. 그는 “혼자 아프다 혼자 죽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수몰 전부터 이곳에서 산 한씨는 남편과 사별했고 자녀는 도시로 나가 혼자다. 두런두런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양 원장이 최근 병원을 다녀온 한씨에게 처방전 목록을 보여달라고 했다. 모르는 약은 일일이 스마트폰으로 약전을 뒤져 성능을 확인했다. 약 대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양 원장은 “혈압약은 양을 좀 줄여도 될 것 같은데 다음에 병원에 가면 물어보라”고 한씨에게 말했다. 양 원장이 특히 신경 쓰는 게 약이다. 한국에 중복·과잉 처방이 많아서다.
한씨는 거동에 큰 문제가 없었다. 8월에 허리에 주사를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른쪽 무릎이 부어 있었다. 무릎을 만져본 양 원장은 “조그마한 주사를 놓겠다”고 했다. 의사는 좁은 공간에서 무릎을 꿇고 앉는 불편한 자세로 주사를 놨다.
뒤에서 “어머니 냉장고 좀 열어볼게요”라고 말한 최재희 케어 매니저가 집안 살림살이를 들여다봤다. 최 매니저는 진료 일정을 잡는 게 주 업무지만 필요시 생활환경 개선과 요양보호사 연결 등의 업무도 지원한다. 최근 공들이는 일은 주거개선 사업이다. 미끄러운 욕실 바닥 타일 보수, 안전 손잡이 설치, 턱 난간 제거 작업 등이다.
오전에 찾은 집 상황이 가장 열악했다. 무릎이 아파 1년 넘게 거동을 못 하는 80대 노모가 아픈 아들과 살고 있었다. 이 할머니의 가장 큰 문제는 이동이었다. 무릎을 펼 수 없어 잠도 제대로 못 자지만 여성 요양보호사와 아픈 아들 도움만으로는 대처 병원에 가는 게 큰일이다. 올해 병원을 마지막으로 간 게 지난봄이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은 수많은 약 중에 진통제가 상당하다고 양 원장은 말했다. 진통제로 참으면서 버티는 것이다.
이날 동행취재는 지역의료의 문제, 그중에서도 최악 상태인 방문진료·간호의 실태를 간접 경험하기 위해 진행됐다. 오지에 사는 이들이 도시에 있는 병원이나 보건소 등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들에게 방문진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양 원장에 따르면 현재 방문진료를 하는 의사는 한국 전체 의사의 0.4% 정도밖에 안 된다. 춘천에도 양 원장 외에 없다.
시골에선 이동할 수 있어도 병원 찾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체 의사인력 중 농촌지역 의사 수는 3.9%에 불과했다. 춘천이 속한 강원도의 경우 같은 해 국토교통부가 분석한 결과 가장 가까운 병원까지 도로 이동거리가 22.73㎞로 서울 1.97㎞의 20배가량 됐다.
양 원장이 올해까지 4년째 방문진료를 할 수 있는 건 센터가 속한 강원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과 한국수자원공사의 도움 덕이다. 조합이 이 사업을 기획했고, 수자원공사는 필요한 경비를 댄다. 소양강댐이 수자원공사 관할이라서다. 하지만 3명의 인건비와 사무실임대료, 차량유지비, 약제비 등 모든 비용을 포함한 센터 1년 운영비는 지난해 한국 의사 1인 평균소득보다 적다. 센터는 방문진료 시 어떠한 돈도 받지 않는다.
이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민간 조합과 공기업이 대신하는 기형적인 시스템이다. 양 원장은 “왕진 수가를 높이는 것만으로 방문진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며 “보다 중요한 것은 왕진의 주체가 민간 의료가 아니라 공공의료 영역으로 바뀌는 것이다. 방문진료 전담 기관을 만들고 전문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