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컷 페미’ 혐오 앞에서 탈코르셋을 재조명하는 이유 [정지혜의 빨간약]

‘한국 남성이 점원을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 폭행하다’(South Korean man attacks shop clerk he thought was a feminist - BBC 뉴스 제목).

 

지난 4일 경남 진주의 한 편의점에서 또 한 번의 ‘젠더 폭력’ 사건이 벌어졌다. 좀 더 정확히는 ‘남성의 여성 대상 폭력’이고, 보다 더 확실하게 기술하자면 BBC가 쓴 위와 같은 제목이 된다.

 

숏컷을 한 여성 직원을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은 자신을 “남성연대”라고 밝힌 20대 남성 A씨였다. 그는 또래인 20대 여성 피해자에게 “머리가 짧은 것을 보니 페미니스트”이며 “페미니스트는 좀 맞아야 한다”고 말했다. 피해 여성은 인대와 귀 등을 다쳤고, 옆에서 폭행을 만류하던 50대 남성은 어깨, 이마, 코 등에 골절상을 입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A씨는 특수상해 및 재물손괴 혐의로 구속됐다.

 

◆숏컷 여성이라 폭행당했다 vs 남성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 여성을 때렸다

 

이 충격적인 뉴스를 전달한 많은 기사가 있었지만 숱한 국내 언론보다도 영국 BBC의 기사가 단연 눈에 띄었다. ‘누가(한국 남성이), 무엇을(점원을), 어떻게(폭행했다), 왜(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서)’로 이어지는 BBC 기사 헤드라인이 사건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한 줄 요약이라서다.

 

이에 비해 한국 기사들은 주어가 축소되고 범행 동기는 표면적으로만 적시된 편이다. 대부분 ‘여성이 짧은 머리라는 이유로 맞았다’ 정도로, 남성의 문제적 발언은 따옴표 처리하는 수준으로 정리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소 관습적이고 안전한 선택이라는 점에서는 아쉽다. 그렇게는 이 사건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할 수 없어서다.

 

이 폭행의 이유는 머리가 짧아서라기보다는 페미니스트로 인식되어서인 만큼 ‘숏컷’보다는 ‘페미니스트’를 명시하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다.

 

또한 주어를 분명하게 적시한 BBC와 달리 한국 기사들에선 상당수가 가해자를 생략하거나 뒤로 보낸 점이 구별된다. 이는 누가 저런 짓을 저질렀는지 뭉뚱그리며, 가해 행위보다 피해 정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에서 비롯된다. 사건을 진지하게 ‘사회 문제화’하기보다 피해자에 대한 단순한 동정론에 그치거나 선정적 콘텐츠로 소비되고 말게 만드는 건 그래서다.

 

이런 한계로 인해 혐오 범죄에 대한 사회적 맥락과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전하기보다는 그저 문제가 커지고 있다는 것만 중계하는 꼴이 되기도 한다. 피해자와 동질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무력감만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무심하게 쓰인 젠더 폭력 기사가 얼마나 많은 여성을 위축시켜왔는지 떠올려보면 답이 나온다. 

 

◆‘페미 때리기’ 부추긴 사회의 책임…세력 키운 반페미

 

한국 언론이 취하는 이같은 모호함의 배경엔 여전히 자리잡지 못한 우리 사회의 성평등 규범 현주소가 있다. “페미니스트 같아서 때렸다”는 말에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 아직도 입장이 단호하지 못하다. ‘누구든 맞아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 합의까지는 왔는지 몰라도 ‘그래도 페미는 조금…’이라는 정서가 남아있다.

 

숏컷 페미니스트 여성? ‘숏컷이 뭐가 문제냐’며 1단계를 통과했더라도 ‘페미니스트가 뭐가 문제냐’는 데서 답하길 곤란해 할 모습들이 그려진다. 이런 머뭇거림을 알기에 언론은 굳이 한 발짝 더 나가지 않는다. 일부 정치권은 이를 반대로 악용하기까지 한다.

 

페미니즘도 성평등도 이야기하지 않고 ‘젠더 갈등’이 해소되기만을 바라는 사회의 안일함이 결국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여성혐오 범죄’나 ‘젠더 폭력’이라는 호명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사회에서 분명 반페미니즘 남초 커뮤니티 사상은 세를 불려왔다.

 

법이나 윤리보다도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면 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동안 ‘반페미니즘은 안 된다’는 신호를 명확히 주지 못했기에 반페미와 백래쉬는 ‘그래도 되는’ 것으로 점점 굳어졌다. 그 결과 “페미는 맞아야 한다”는 남초 커뮤니티에서나 통용되던 세계관이 마침내 현실에서 실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사상과 이념의 부재,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중립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우리 사회의 경향성과도 맞닿아 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처한 입장과 살아온 세월에 근거해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보는 관점을 갖게 된다. 완벽한 중립과 객관이란 애초에 환상 같은 개념인지 모른다.

 

예를 들어 성평등주의도 사상이고, 이에 반대하는 성차별주의도 사상이다. 성평등주의도 성차별주의도 아닐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엇이 우리의 공동체를 가장 이롭게 하는지 끝없이 탐구하고 옳고 그름을 가려내려는 노력이다. 사상과 이념은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 바탕이 된다. 그러니 언급을 피하기는커녕 더 더 많이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

 

◆‘숏컷 페미’ 아니면 안전할까…다시 보는 탈코르셋

 

마침내 온라인 밖으로 터져나온 물리적 폭력에 여성들은 한층 더해진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자신의 짧은 머리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며 ‘숏컷 챌린지’에 나서고, 가해자를 엄벌하라는 목소리를 높이는 중이다.

 

2021년 도쿄올림픽 때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의 짧은 머리로 일부 남성들이 ‘페미인지 해명하라’며 사이버 공격을 퍼붓자 대항의 의미로 나온 숏컷 챌린지가 다시 등장해 1만건이 훌쩍 넘는 동참글이 올라왔다.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둔 사회와 국가 시스템에는 기대할 바가 없다는 체념이 동력을 더한 것으로 보인다.

 

여성주의 팀 화로(@blazing――fire――)는 관련 해시태그 운동(#남초커뮤니티―여성폭행 #여성―숏컷―캠페인)을 주도한 데 이어 전국여성공동행동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화로는 “짧은 머리 여성 타겟 혐오범죄 사건과 이후 남초 커뮤니티에서 가해지는 마녀사냥 선동에 규탄한다”며 “짧은 머리 여성을 향한 폭행은 있어도 짧은 머리 남성을 향한 폭행은 없었다. 이것은 여성혐오 범죄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캠페인이 일부 여성주의자들에게만 관심사인 것 같아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결국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는 인식 때문일 것이다. ‘숏컷도 페미도 아니면’ 일어날 위험이 없는 일이라 생각될 수 있어서다.

 

안타깝게도 이는 희망적 사고에 가깝다. 여성혐오 정서가 통용되는 사회에서 여성이 ‘∼하지만 않으면’이란 모든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여성이 하면 안 되는 것의 조건을 늘려가면서 갈수록 더해지는 족쇄에 불과하다. 부당한 규칙을 깨부수는 것만이 족쇄를 푸는 길이지만 상당수는 여전히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규칙’을 준수하는 쪽을 택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혹은 유일한 안전 확보의 길이라는 믿음에서.

 

반대로 비록 소수지만 규칙 자체에 저항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사회적으로 강요된 여성성을 벗어던진다는 의미의 ‘탈코르셋’ 운동이 대표적이다. 여성이 의식하는 외모 강박이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인 한국에서 이 운동이 태동했다는 것이 무엇보다 의미 있다. 탈코 운동에 동참하는 여성들은 긴 머리, 두꺼운 화장, 신체를 드러내는 옷차림 등으로부터 멀어지고 꾸미지 않은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불씨가 된 숏컷과 페미니즘의 강한 연결고리는 바로 이 탈코 물결에서 비롯됐다. 그런 점에서 숏컷과 페미니즘은 상관 관계가 뚜렷한 것이 맞다. ‘숏컷 했다고 다 페미니스트냐’는 반발 혹은 자기방어는 좀 넣어둬야 하는 이유다.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은 사회 운동으로서 탈코르셋의 효과에 주목하고, 거대한 백래시 흐름 속에서 이를 어떻게 잘 이어갈지 고민하는 일일 것이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고 싶지 않다면 페미니스트 여성을 향한 노골화 된 위협 그 자체를 직면하고 처리해야 한다. 이는 결국 여성 전체를 겨냥한 검열과 통제의 신호다. ‘페미만 아니면 괜찮다’는 건 착각이다. “여성혐오가 아닌 ‘페미혐오’”라는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처럼.

 

 

 

*‘정지혜의 빨간약’은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그랬듯 빨간약을 먹고 나면 보이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예민하게 분석해보는 코너입니다. 다루었으면 하는 주제가 있다면 제보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