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때문에 월세로 갈까 많이 고민했죠. 근데 둘이서 살 집이 월세 100만원이 넘는데 별수 있나요. 위험하다고 해도 잘만 고르면 피해를 안 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결국 전세를 택했어요.”
내년 1월 결혼을 앞둔 직장인 정모(33)씨는 지난달 경기 광명시 하안동에 마련한 신혼집에 입주했다. 청년전용 버팀목 전세자금대출 1억1000여만원에 자비 5300여만원을 더해 얻은 전셋집이다. 금리 2.1%가 적용돼 매달 납부하는 이자는 20만원이 조금 넘는다. 전세사기에 대한 두려움이 컸지만 집을 매입하거나 월세를 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큰 부담이었다. 내 집 마련은 여전히 높은 집값에 엄두도 못 내고, 월세는 전세대출 이자의 5배 수준을 감당해야 했다.
전세사기 불안 속에서 ‘안전한 전셋집’을 구하기 위해 정씨는 안간힘을 썼다. 두 달 가까이 주말마다 집을 보러 다녔을 정도로 발품을 팔았다. 전세사기가 많았던 서울 일부 지역은 아예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정씨는 “거래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지역인지, 매매가와 전세가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꼼꼼히 확인했다”며 “공인중개사와 집주인이 싫은 티를 내도 특약을 네 가지나 부탁해서 넣었다”고 말했다. 그는 새집에 거주하는 동안에도 등기부등본을 계속 확인할 계획이다.
◆월세 사는 건 10명 중 3명 수준…결국 ‘돈’ 때문
‘빌라왕’, ‘건축왕’ 등 지난 1년간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을 휩쓴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태의 공포는 세입자들의 삶을 어떻게 바꿨을까. 세계일보는 전세사기 주요 피해자군이었던 20∼30대 청년층 세입자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통해 이를 살펴봤다.
19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그 답은 ‘그래도 전세를 찾는다’로 수렴됐다. 한국 사회에서 아직은 전세가 가장 경제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전세사기는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의 위험성이지만 비싼 월세는 당장 눈앞의 현실이다.
저금리에다 비교적 접근성이 높은 전세대출상품에 비해 월세 관련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전세사기에 대한 위험 등으로 ‘흔들리는 주거사다리’이지만 주거 비용을 아끼려면 이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세계일보가 여론조사회사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지난달 26일부터 이달 1일까지 전국 성인 남녀 세입자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현재 월세살이 중인 이는 34.3%에 그쳤다.
전세를 택한 이유는 ‘전세보증금을 전액 돌려받을 수 있어서’(60.2%, 복수응답)가 압도적이었다. ‘전세보증금을 낼 목돈이 있어서’(34.6%), ‘대출이자가 월세보다 저렴해서’(25.2%), ‘전세대출을 쉽게 받을 수 있어서’(19.4%)라는 응답이 뒤를 이었다.
반면 월세를 택한 이유로는 ‘전세보증금을 마련할 수 없어서’(56.6%, 복수응답)가 56.6%로 가장 많았다. 전세 거주자 3명 중 1명은 보증금을 낼 목돈이 있어서 들어갔다고 답했고, 월세 거주자 과반은 그런 목돈이 없어서 전세를 살지 못한다고 한 셈이다. 돈이 없어 월세로 왔는데 월세는 대체로 전세 이자보다 비싸기에 이들이 느낄 경제적 부담은 악순환 될 가능성이 높다.
◆전세사기 피해자도 “다시 전세로” 향하는 이유
여전히 전세를 찾는 사람들의 선택은 ‘월세가 너무 비싸다’는 데에 방점이 찍힌다. 전세사기 사태 이후 월세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판단해 임대인들이 월세를 더 올린 경향도 있다. 고금리 시대가 되어도 월세 자체가 훌쩍 뛰어버리니 전세 이자가 이를 넘어서기 쉽지 않다.
한국부동산원 월간주택가격동향에 따르면 전국 빌라 월세가격지수는 꾸준히 상승세를 기록 중이다. 지난 3월 0.03%로 상승 전환된 월세가격지수 변동률은 이후에도 계속 확대됐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를 본 당사자들조차 다음에 살 집으로 다시 전세를 가거나 매입을 하는 등 월세는 잘 고려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2월쯤 집주인이 연락 두절되면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직장인 안모(35)씨는 집주인과 소송까지 불사하며 전세대출금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1심을 승소했지만 “돈이 없다”고만 하는 임대인으로부터 약속한 날짜인 다음 달 안에 돈을 받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안씨는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 자격으로 받은 저리 대출금 1억원에 자신의 돈 5000만원을 보태서 보증금을 마련해 월세 10만원의 반전세 집으로 옮겼다. 그는 “우리나라는 금리가 아무리 올라도 전세가 더 싸서 아직도 이게 유리하다”며 “월세가 많이 오르면서 부담이 더 커지기도 했다”고 씁쓸해했다.
보증보험에 가입했지만 지난해 임대인이 사망하면서 보증금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인 배소현(28)씨는 “한바탕 고생하고 보니 이제 두 번 다시 전세는 못 가겠다, 너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도 “그렇다고 월세를 가자니 신혼부부에 강아지까지 있으니 비용이 만만찮을 것 같아 급하게 집을 매매했다”고 토로했다.
원래 계획은 전세를 가는 것이었지만 또 한번 위험을 감수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배씨 부부는 “수준에 맞는 지역으로 내려와서 집을 사자고 결정해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와서 경기 화성시에 자가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약화한 주거사다리… 남은 건 ‘각자도생’
한국에서 전세제도는 주거사다리로서 기능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장점만 부각된 측면이 있다. 정부가 정책적인 금리 지원을 하면서 획기적으로 낮은 이자를 적용한 전세대출 상품이 등장하자 ‘전세 활황’ 시대가 막을 열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월세 지원은 사람들을 더 전세로 몰아넣었다. 세계일보 설문조사에서 ‘전세자금 저리 대출’(13.2%)을 이용한 이는 ‘지방자치단체 월세 지원제도’(6.3%)를 받은 이보다 2배 이상 많았다.
전세대출을 딛고 활성화한 현재의 전세는 역설적으로 주거사다리 기능을 약화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월세 대비 주거비가 낮다는 점만 볼 것이 아니라 전세를 살면서 ‘실제로 자산이 축적되느냐’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창무 한양대 교수(도시공학)는 “과거에는 전세대출 이용이 일반적이지 않아 자신의 자산을 쌓아 가며 전셋집에 살고 자가를 살 목돈을 만드는 구조였지만 청년층에 저리 전세대출이 주어진 지금은 그 연결고리가 끊겼다”며 “전세 대출이 없었다면 20평짜리 다세대 주택에 살 이들이 25평 아파트에 가는 식인데, 결과적으로 내 자산은 그대로인 채 대출만으로 과소비를 하는 셈이 된다”고 설명했다.
전세금을 대출받은 임차인이 이를 임대인에게 다시 빌려주며 형성된 ‘이중 레버리지’ 고리는 저렴해진 이자율만큼 리스크를 더 증폭시키기도 했다.
전세사기 피해자인 배소현씨는 “돈 모으려고 들어갔다가 오히려 파산할 뻔한 상황을 겪으며 주거사다리가 많이 무너졌다고 절감했다”며 “나라에서 민간 임대 사업자들 데리고 전세 활성화만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될 것이고 이건 전세사기범을 나라가 도와주는 꼴밖에 안 된다”고 강조했다.
‘대출받아서 더 좋은 집에 살라’며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한 정부가 정작 전세제도의 위험성을 낮추는 정책 마련에는 소홀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마침내 터진 전세사기라는 폭탄은 전세라는 주거사다리가 실은 얼마나 빈약한 토대 위에 세워졌던 것인지 실감케 했다. 설문조사에서 월세 세입자 10명 중 3명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까봐’(30.3%) 월세를 산다고 답해 전세사기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했다.
세입자 보호 시스템이 부실한 탓에 세입자들은 스스로 더 많이 알아보고 조심하는 편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올해 말 전셋집 계약이 끝나는 이현우(29)씨는 현재 전세제도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해 다음 집은 월세로 갈 계획이다. 이씨는 “전세보증보험이라는 시스템도 결국 모든 리스크를 보증보험사에 떠넘겨 관리하는 것이라 이곳까지 파산하면 사실상 세입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대인이 언제부터 사업을 했고 연체는 했는지 등을 확인하기 쉽지 않은 지금의 부동산계약은 위험성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불완전계약”이라고 지적했다.
1인 가구 직장인 나병찬(27)씨도 높아진 위험 부담 속에서 안전한 전세 매물을 구하는 방편으로 “청년전용 버팀목 전세자금대출 상품을 이용할 수 있는 집만 찾았다”고 했다.
최근 세 번째 전셋집으로 이사한 30대 직장인 이모씨 역시 전세사기 사태 이후 더욱 깐깐하게 임대인 정보를 수집했다. 이씨는 “집주인이 주택 임대로 먹고사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에 직접 인터넷 검색을 해 봤다”며 “그랬더니 지방의 한 가구 업체를 운영한다는 것을 알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고 했다.
하지만 세입자가 이런 정보를 국세청에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건 계약서를 쓰고 나야만 가능하다. 이를 맹점으로 지적한 이씨는 “세입자 입장에서는 계약하기 전에 이 사람이 안전한 사람인지 알고 싶은 건데 국세청에 이걸 알아볼 때 임대차 계약서를 가져가야 하더라”며 “계약한 후에 ‘아차’ 하면 뭐 하나 싶었다”고 말했다.
문제없는 전셋집을 찾으려는 세입자들의 노력은 여전히 한계가 있어 전세사기를 예방하기 힘든 현실을 방증했다.
설문조사에서 세입자들은 전세 계약을 앞두고 ‘등기부등본’(81.9%), ‘확정일자 부여 현황’(47.7%), ‘건축물 대장’(41.4%) 정도만 주로 본 것으로 드러났다. 반면 최근 전세사기에서 문제가 된 ‘집주인 채무 현황’(28.0%), ‘전입세대 확인서’(27.0%), ‘국세·지방세 체납 여부’(13.8%), ‘경매시 보증금 환수 가능성’(7.1%) 등을 알아봤다는 응답은 저조하게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