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리가 다시 에이펙에 주목해야 할 이유

전쟁과 미·중 패권경쟁, 경기 침체 가능성으로 국제 정세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가운데 금문교로 유명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2023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는 골든게이트 선언문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경제협력을 강조하고 국제규범에 기초한 세계경제질서 확립에 기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줬다.

1989년 장관급 각료회의로 출범한 에이펙은 1993년부터 정상회의로 격상됐으며 첫 정상회의는 시애틀에서 개최됐다. 30주년이 된 올해 주최국인 미국은 ‘모두를 위한 회복탄력적이고 지속가능한 미래 창조’를 회의 주제로 설정하고 상호연결(interconnected), 혁신(innovative), 포용(inclusive)을 핵심 의제로 선택해 1년간 논의를 주도해왔다.

정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대외협력부원장

에이펙 회원국들은 정상회의 선언문을 도출하기 위해 매년 수차례의 고위관리회의(SOM) 및 산하회의, 분야별 장관회의 등에서 다양한 의제를 논의한다. 올해는 미국 호놀룰루·팜스프링스·디트로이트·시애틀에서 회의를 개최해 지속가능하고 포용적 경제를 강조한 마노아 의제(ISOM), 디지털 경제에 대한 디지털 태평양 의제(SOM2), 공급망 강화·반부패·중소기업 회복력·이해관계자의 네트워크 강화가 주요 골자인 베이지역 의제(SOM3)를 차례로 발표했다. 에이펙 창설국이자 핵심 회원국인 한국도 에너지 전환과 기후변화 대응을 통한 경제협력 강화, 디지털 공동번영사회 실현을 위한 역할과 책임을 수행할 의지를 표명하면서 논의에 적극 참여하고 최종 성과 도출에 기여했다.



우리는 왜 다시 에이펙에 주목해야 하는가? 신자유주의와 세계무역기구(WTO) 중심 다자무역체제가 견고하던 시절에는 아태지역 협의체에 불과한 에이펙의 역할과 기능이 제한적이었다. 에이펙은 구속력 없는 담화장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팬데믹과 전쟁 등 비경제적 요인으로 인한 글로벌 공급망의 붕괴, 보호주의와 자국중심주의의 확산, 디지털 전환 가속화, 기후변화 대응 등이 글로벌 공통 과제로 대두되면서 에이펙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새로운 질서와 규범 수립의 중심에 있어야 할 WTO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에이펙은 아이디어의 인큐베이터로서 오랜 기간 가치를 인정받았다. 무역·투자 자유화와 경제개발협력 등 공동번영을 위한 제도적 혁신에서 선도적 역할을 일관되게 수행해왔기 때문이다. 에이펙은 환경상품협정(EGA) 합의를 통해 WTO 환경상품 협상을 이끌어내는 성과도 거뒀다. 컨센서스와 자발적 참여를 기본 원칙으로 삼으며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는 에이펙이 오히려 새로운 경제 협력틀을 제시하는 유용한 플랫폼이 될 수 있다.

한국은 2025년 에이펙 정상회의를 개최한다. 우리가 제안하고 주도해온 에이펙 역량강화사업(CBNI)은 모범 사례 위주의 성과를 확산해 역량을 강화하는 사업으로 회원국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으며 가장 바람직한 협력 모델로 자리 잡았다. 이제 에이펙 정상회의 개최를 위해 디지털 기술 혁신과 청정에너지, 선진국과 개도국의 포용적 경제협력 프레임워크 구축에 기여할 미래지향적 의제를 발굴해 글로벌 중추국가로 우뚝 설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에이펙에 다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