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집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있었다. 그에게 머리를 감는 순간은 어떤 생각들이 모이는 시간이기도 하다.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색 신호를 기다릴 때처럼. 불현듯 며칠 전 인터뷰와 답변이 떠올랐다. 마당이 딸린 개?
“개요!” 그러니까 언젠가 인터뷰에서 어떤 동물을 좋아하느냐라는 질문을 받고, 소설가 윤고은은 흔쾌히 대답했다. 대답은 조금 더 이어졌다. “이왕이면 마당 딸린 개였으면 좋겠어요.”
그때 내가 왜 그런 답을 했지? 내 심리에 어떤 게 있었던 거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순식간에 상상으로 바뀌었고, 다양하게 퍼져 나갔다. 사람과 개가 나란히 있을 때, 사람들은 사람을 개의 주인으로 보고 생활의 배경이 되는 집을 당연히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런 생각을 약간 바꿔보면 어떨까…. 그러니까 개가 집의 주인이고, 사람은 거기에 잠깐 초대되거나 잠깐 세 들 듯이 들어오는 사람이면, 그렇다면….
“마당이 딸린 개”를 꿈꾸던 주인공 안이지는 화가를 꿈꿨지만 현실의 높은 벽에 가로막힌 뒤 생존을 위해 배달 라이더로 살아간다. 어느 날 예술가들에 대한 파격적인 지원으로 유명한 미국 ‘로버트재단’에서 전폭적인 후원을 하겠다는 솔깃한 제안을 받는다. 로버트재단의 로버트는 개인데, 재단의 후원 조건은 전시회 마지막 날에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 한 점을 소각해야 한다는 것.
안이지는 재단 후원을 받은 모든 작가들이 큰 성공을 거뒀기에 조건을 수락하고 미국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작품을 불태우라는 스폰서와, 작품을 태워 버릴 수 없다는 작가적 자존심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면서 점차 긴장이 고조되는데.
“내가 간과한 게 있었다. 소각되어도 상관없는 작품을 만든다는 게 말이 쉽지만 그런 목적으로 시작했다가도 작가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는 것. 그걸 놓쳤던 것이다. 정말 그랬다. 한 작품을 소각용 제물로 삼음으로써 다른 작품들을 화염의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소각용 제물을 정교하게 만드는 과정, 로버트를 유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에 그 작품을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고, 그러다 정이 들어버렸다. 그것을 제물로 써도 괜찮은 것이었나?”
작가 윤고은은 왜 생각하는 개와 작품 소각을 다룬 작품을 써야 했을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상상력 가득한 윤 작가를 지난 7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작가 후원자가 로버트라는 개인데, 왜 개를 후원자로 설정한 것인가.
“이번 작품의 전신이 된 짧은 동명의 단편 ‘불타는 작품’이 있다. 역시 개의 후원을 받는다는 설정이었는데, 당시 소설을 쓸 때 만난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개? 다들 이런 반응이었다. 저는 생각하는 실물의 개를 말했지만, 사람들은 자꾸 은유로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개에 대해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라는 생각과 함께 비하의 존재로 여기는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완성된 미술품을 소각한다는 설정은 왜 했는지.
“현대에는 예술과 작품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술과 작품 안에 스토리가 부여돼 시선과 관심을 끌어야 한다. 로버트재단 역시 작품을 우쭈쭈하는 방식이 아닌 완벽하게 파괴시키는 방식으로 예술을 스토리텔링해 관심을 끌려 했다. 소각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하는 자극적인 방식이었다. 처음 어떤 작품을 완전히 없애는 것, 즉 한 작가가 작품을 만든 다음 누군가 그 작품을 선택하면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정도의 조건만 생각했다. 없애는 방식, 훼손 방식은 다양한데, 소각이 상징적이면서도 완벽하게 복구 불가능한 상황으로 만드는 가장 강력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주인공 안이지는 마지막에 자신의 원작을 보존하려 하는데.
“주인공이 마지막에 진짜 원작을 빼내는 데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주인공은 자신이 빼낸 작품이 원작이길 바라지만, 처음 긴가민가한다. 빼낸 것이 원작인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트 딜러는 불타고 있을 때만 진짜이고 빼돌리면 진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사람들도 결과와 스토리에 집착한다. 하지만 주인공이 빼돌리기 위해 두 개의 작품을 만드는데, 작품을 만들 때의 마음만은 진짜일 것이다.”
―이번 작품은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선 좋아하는 이야기를 마음껏 쓴 작품이다. 나중에 이 작품과 연결될 수 있는 다른 작품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꾸 돌아보고 싶은 지점이 되는 작품 같다. 윤고은의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까. 저는 그동안 부품이 되거나 소모되는 인물을 많이 썼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작품의 인물들은 계속 움직이고 날뛴다. 주인공 안이지가 계약과 달리 위작을 그려서 바꿔치기를 하려고 하는 등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하려 한다. 인물들에 능동성을 좀더 부여하려고 한 작품이었다. 그런 면에서 골목을 막 돈 느낌이 든다.”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고은은 2008년 장편소설 ‘무중력 증후군’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등단 이후 장편소설 ‘밤의 여행자들’, ‘해적판을 타고’, ‘도서관 런웨이’를, 소설집 ‘1인용 식탁’, ‘알로하’, ‘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 등을 발표했다. 이효석문학상,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 등을 수상했다.
―소설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이 있다면.
“정해진 원칙이 있진 않지만, 글을 쓰는 내내 리듬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진 찍기 위해서 좋은 위치를 선점해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쓸 때 가상의 좋은 위치를 두런두런 찾다가 여기서 써야지 하는 위치가 있는 것 같다. 이 문장과 저 문장 사이가 계속 흐르듯이 연결이 돼야 쓸 수가 있다. 어떤 사건의 연속일 수도 있지만, 문장에서 느껴지는 리듬감이 있어야 쓸 수가 있다. 조명 같은 것에도 기대려고 하고, 음악 없어도 쓸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음악 같은 것에 기대려 하기도 한다. 리듬감이 속도일 수도 있고, 지루하면 안 된다라는 느낌일 수도 있다. 작품을 쓸 때는 지루한 반복이나 부연을 없애려고 하는 편이다. 결국 문체이겠지만.”
볼 것이다. 오전 7시쯤 일어나서 간단히 씻은 뒤 천천히 아침을 먹는 그를. 빈속에 물부터 채운 뒤 채소를 시작으로 코스 요리를 먹듯이. 마치 하루의 첫 단추를 끼우는 것처럼. 당신은 볼 것이다. 라디오 방송이 있는 날이면 일산으로 출근해 일하고, 약속이 없으면 오후 4시 무렵 귀가하며, 오후 11시쯤 꿈나라로 향하는 그를.
만날 것이다. 왕복 네 시간 안팎의 긴 출퇴근 동안 부지런히 메일을 주고받거나 글을 쓰는 등 여러 일을 하는 윤고은을. 우리는 만날 것이다. 마감이 다가오면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기도 하고, 지하철에서도 백화점 화장실에서도 글을 쓰는 소설가를. 장소에 상관없이 조각조각 글을 풀어가는 소설가 윤고은을. 발칙한 상상력으로 독자를 놀래려는 그의 분주한 마음을.
“일이 시작되면 글을 잠깐 덮어놓습니다. (일과 글쓰기라는) 서로 다른 세계를 다녀오니까 머리가 식혀지고 환기가 돼서 그런지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 같아요. (일과 글쓰기의) 두 세계를 오가는 것이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정서적으로 괜찮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