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청년들, 정부 보조금으로 내집마련… “집값 걱정 안 해” [심층기획-주거안정이 민생안정이다]

(5회) 공공주도 주거, 꿈이 아니다

싱가포르 공공주택 가보니…

목돈 없이도 누구나 ‘공공주택’ 분양 기회
임대기간 99년·매매도 가능… 사실상 소유
대부분 결혼할 때나 35세 되면 첫 분양
정부, 소득·입지 따라 최대 8만달러 지원
현금지불 집값의 5%뿐… 차액은 저리대출

집이 청년들 ‘도약의 발판’으로
촘촘한 주거지원 덕 자가보유 89% 달해
다주택자는 막대한 세금 부과… 투기 차단
“집값 급등해도 정부가 해결” 신뢰 높아
韓정치권 “싱가포르형 주택 도입” 말뿐

“싱가포르 집값 비싸죠. 근데 여기 청년들은 걱정 안 해요. 보조금을 받으면 지불 가능한 수준이거든요.”

 

싱가포르국립대에 다니는 대학원생 흥시잉(28)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로서는 결혼 생각이 없다는 그는 “지금 부모님이랑 살고 있는데 35살이 되면 독립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 북동부에 위치한 풍골에 공공주택이 늘어서있다. 싱가포르 정부는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풍골을 신도시로 지정해 개발시켰다. 싱가포르 주택개발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풍골의 공공주택 4만9909채에 18만7800명이 거주하고 있다.

싱가포르에는 ‘집값 걱정이 없다’, ‘2030 세대도 충분히 자가를 마련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청년들이 많다. 최근 세계일보 취재진이 현지에서 만난 청년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내 집 마련’ 계획을 갖고 있었고, 주거 비용을 고민하지도 않았다. 이들이 그리는 미래는 ‘부모님 집에서 독립할 때면 집을 산다’로 수렴됐다. 집을 매입하기 전에 우선 전세나 월세로 살며 돈을 모으는 한국의 방식과는 달랐다.

 

비결은 싱가포르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주택’에 있었다. 24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주택개발청(Housing and Development Board·HDB)에 따르면 21세 이상 기혼 혹은 35세 이상 미혼 싱가포르 국민이라면 누구나 공공주택을 분양받을 기회가 보장된다. 공공주택은 공공 ‘임대’ 주택이지만 임대 기간이 99년에 달하고 매매도 가능해 사실상 집을 소유하는 개념이다. 지난해 기준 싱가포르인 77.9%는 공공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10명 중 9명 “내 집에 산다”

 

청년들이 공공주택을 찾는 가장 큰 이유로는 정부 보조금이 꼽힌다. 싱가포르의 한 회계법인에서 일하는 데이먼(27)은 “싱가포르 청년은 대부분 결혼할 때나 35살이 되면 첫 공공주택을 분양받는다”며 “보조금을 받는다면 낼 수 있는 가격이라 집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고 전했다. 그가 말한 보조금은 싱가포르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주택 분양을 원하는 이들에게 제공하는 지원금이다.

 

지난해 말 국토연구원이 발표한 ‘싱가포르 주거정책 심층 사례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보조금 규모는 소득 수준과 주택 입지 등에 따라 5000∼8만달러(약 600만∼9600만원)로 다양하다. 소득이 낮은 사람이 집값이 높은 지역에 살게 될 경우 더 많은 보조금을 지원하는 식이다. 보조금을 적용하면 싱가포르인이 체감하는 집값은 훨씬 낮아진다. 공공주택 신규 분양 기준 보조금을 받기 전 연소득 대비 주택가격배율(PIR)은 5.7~7.0배로 높지만, 보조금 적용 후에는 4.4~5.2배로 떨어진다. 한국도 신규 분양 기준 5.2배지만, 일반 주택시장은 7.6배까지 오른다.

 

이마저도 현금으로 지불해야 하는 건 집값의 5%뿐이다. 나머지는 한국의 국민연금 격인 중앙연금기금(CPF) 적립금이나 주택개발청이 2%대 저리로 제공하는 대출을 이용해 지불할 수 있다. 촘촘한 주거지원 덕에 싱가포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자가보유율을 자랑한다. 지난해 싱가포르의 자가보유율은 89.3%를 기록했다. 자가보유율이 60.6%(2021년 기준)에 불과한 한국과 비교하면 월등히 높다.

 

싱가포르국립대 도시계획과 이관옥 교수는 “한국은 집을 구매하려면 목돈이 필요해서 젊은 층이 전셋집에 들어가 돈을 모으지만, 싱가포르에서는 목돈이 필요하지 않다”며 “청년이나 신혼부부도 자기 일단 5%의 최초 구입비만 지불하면 내 집을 마련할 기회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가를 보유한 이들은 주택 가격이 상승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산도 늘어난다”며 “집이 청년들의 ‘도약의 발판’이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집값 폭등? “정부가 해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지나 일상으로 회복이 본격화하면서 싱가포르 집값이 급등해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싱가포르인들은 정부가 주거 문제를 해결하리라는 믿음이 있다. 대학원생 조이스(25)는 “코로나19 이전보다 집값이 비싸진 건 사실”이라면서도 “정부가 이제 공급을 늘린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집값은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어린 아이들도 정부를 신뢰하고 있었다. 싱가포르 북동부에 위치한 풍골에 살고 있는 엘레나(14)는 “정부가 노력하고 있으니 집값은 걱정되지 않는다”며 웃어 보였다.

 

싱가포르 정부는 집값 안정을 위해 올해 공공주택 4만호, 2025년에는 10만호를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코로나19 동안 건물 신축이 중단됐던 탓에 공공주택 신규 분양은 줄어들며 분양 대기 기간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공공주택을 재판매하는 재판매(resale)주택이나 민간주택으로 넘어갔고, 해당 시장 가격이 급등했다는 분석에서 비롯된 대책이다.

 

한국에서 주택 공급을 늘리는 방식은 다주택자를 양산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싱가포르는 다르다. 보유 주택 수에 따라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1∼6% 수준인 기본 취득세에 더해, 두 번째 주택은 20%, 세 번째 주택부터는 30%의 추가 취득세를 부여하고 있다. 외국인 대상 세금은 60%에 달한다. 주택을 임대할 경우에는 주택 가격에 따라 0∼23%의 재산세도 매긴다.

 

무지막지한 세금을 견디지 못한 다주택자는 집을 처분할 수밖에 없다. 싱가포르의 고급 공공주택인 피나클 앳 덕스톤에 살고 있는 리나(44)는 “이곳에 이사 오기 전 살았던 민간 주택 한 채를 임대시장에 내놨었는데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와서 팔아버렸다”고 하소연했다.

 

싱 티엔 푸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부동산학)는 “정부가 부동산 투자를 막는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1가구 1주택을 권장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동산 시장에 지나친 자금이 유입되면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기업·기술 투자가 줄어들고, 일자리가 늘지도 않으며, 사람들의 소득 창출도 줄면서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지난해 대선에서 양대 정당의 공약(公約)에도 등장한 것처럼 한국 정치권에서 싱가포르형 공공주택을 벤치마킹하겠다는 ‘말잔치‘는 여러 차례 되풀이됐지만, 늘 공약(空約)이 되고 말았다. 이관옥 교수는 “한국에서도 공공주택을 개발할 기회가 없던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 싱가포르형 공공주택을 도입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규모 공공주택이 들어설 땅이 없기 때문”이라며 “신도시를 개발할 때 정부가 부지를 갖고 있었다면 시도할 수 있었을 텐데, 정비한 땅을 정부가 다 팔아버렸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앞으로라도 신도시를 개발할 때 정부가 어느 정도 공공의 토지 소유권을 확보하면 한국에서도 공공주택 도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조언했다.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