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아파트엔 높은 ‘세입자 보호 문턱’… “한국서 빌라 사면 죄인” [심층기획-끝나지 않은 역전세 공포]

<하> 아파트공화국의 저주

전세사기 불안감에 아파트 수요 급증
빌라·오피스텔, 주거사다리 역할 못해

전세보증보험 까다롭고 과세 격차 커
비아파트 업계 “아파트와 차별” 불만

공급 더 줄면 소액 세입자 갈 곳 잃어
전문가 “정부 계약 시스템 구축 시급”

“대한민국에서 빌라를 사면 죄인이 됩니다.”

대전에 사는 30대 A씨는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아직 혼인신고를 하지 못했다. 결혼 전 인천 파견근무를 하게 되면서 구입한 빌라가 발목을 잡았다. 아파트 청약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빌라를 매매한 뒤 혼인신고를 하기로 했지만, 지난해부터 매수 관련 문의 전화를 한 통도 받지 못했다. A씨는 해당 빌라에 1년 남짓 거주하다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면서 전세 세입자를 들였다. A씨는 “당시 전세나 매매나 가격 차이가 별로 없어 빌라를 산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라며 “전세보증금에 1000만원 정도만 더한 가격에 내놨는데도 팔릴 기미가 없다”고 말했다.



연립·다세대주택(빌라)과 오피스텔 등 비아파트 임대차 시장이 위축되면서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제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역전세난이 심화하고 있다.

 

28일 한국부동산의 전국주택가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전국 빌라 평균 전셋값은 1억3137만원으로 지난해 10월(1억3919만원)과 비교해 1년 새 6.0% 하락했다. 오피스텔 평균 전셋값도 1억7266만원에서 1억6703만원으로 3.4% 내렸다.

전세사기 등 여파로 상대적으로 안전한 아파트로 수요가 몰리면서 빌라와 오피스텔이 찬밥 신세가 된 것이다.

아파트는 주차나 보안, 각종 커뮤니티 시설 등 편의성 측면에서 분명히 장점이 있다. 대신 빌라나 오피스텔은 아파트보다 상대적으로 건축규제가 까다롭지 않아 준공 기간이 짧고 가격도 저렴해 서민층 주거사다리 역할을 해왔다. 목돈이 부족한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이 비아파트 전세에서 아파트 전세를 거쳐 내 집 마련에 도전하는 식이다.

 

건설업계에서도 아파트는 중대형 건설사가 주도하고, 빌라·오피스텔은 개인, 소규모 건설업자가 참여하는 식으로 시장이 분리돼 있다. 빌라·오피스텔 건설을 통해 경험과 자본을 쌓은 건설업자가 종합건설업체나 중대형 건설사의 협력사로 성장하기도 한다.

정부도 비아파트의 순기능을 인정하고, 지난 9월 발표한 주택공급 활성화 방안에 민간사업자에게 가구당 최대 7500만원까지 저리 대출을 제공하는 내용 등의 비아파트 금융지원 방안을 포함시켰다. 아파트는 인허가부터 입주까지 통상 4∼5년이 소요되는 반면 빌라는 6개월 안에도 공급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비아파트 업계에서는 아파트와의 차별대우를 지적하는 불만이 크다. 빌라 소유주들은 정부가 전세사기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전세보증반환보험 가입 기준을 공시지가의 150%에서 126%(공시가 140% 가운데 90% 인정)로 낮춰 직격탄을 맞았다는 입장이다. 전세사기를 우려하는 세입자들이 전세보증 가입이 안 되는 빌라를 외면하면서 공시지가 126% 이하로 보증금을 낮추느라 역전세 규모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오피스텔 업계는 ‘주택수 산정 제외’를 요구하고 있다. 오피스텔은 취득세율을 계산할 때는 일반 주택보다 높은 비주택 취득세율(4.6%)이 부과되지만,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등을 산정할 때는 주택으로 보고 중과율이 적용된다. 또 특례보금자리론 등 정책대출에서 오피스텔은 주택이 아니란 이유로 배제되는데, 청약에서는 오피스텔을 1채(수도권 기준 1억6000만원, 60㎡ 이하 예외)만 소유해도 무주택 자격을 잃는 등 불이익을 받는다.

강희창 전국비아파트총연맹 공동회장은 “비아파트를 아파트와 동등하게 인정해 달라는 게 아니라 공정한 무대에서 서민 주거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바로잡아 달라는 것”이라며 “주택 소비자의 지속적인 수요가 필요한데 공급자 측면에서만 지원하는 대책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도 빌라·오피스텔 임대차 시장이 공급자와 수요자 모두 안정적인 상황에서 운영될 수 있도록 돕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진형 공정주택포럼 공동대표(경인여대 교수)는 “빌라 전세가 침체하면 저소득 전세 세입자나 전세 자금 여력이 부족한 세입자들이 갈 곳이 없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빌라 집주인이) 전세 세입자를 구할 수 없으면 빌라 공급 축소로도 이어져 장기적으로 소액 전세 세입자가 갈 곳이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투자 가치가 낮은) 다세대주택에 투자해서 임대 사업을 한다는 것이 남는 장사가 아니라서 사업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결국 청장년 전세 임차 가구의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다주택자의 경우에도 끼어들 수 있는 폭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다주택자에 대한) 과세 격차를 줄여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빌라·오피스텔이 주거 시장에서 공생하려면 아파트보다 취약한 정보 비대칭성의 문제, 주차·보안 편의시설 부족 등의 단점을 정부와 지자체가 메워줘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인만 김인만부동산경제연구소장은 “(전세) 계약 후 사고가 안 생기도록 안전한 계약 시스템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정부가 계약 시스템을 구축하고, 집주인의 세금 체납 정보나 과거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례 등을 검사해 안전한지 알려줌으로써 계약자들이 믿고 계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