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과 레너드 번스타인. 다른 시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간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전쟁과 음악이라는 각 분야의 천재였다는 것과 한 여인을 깊이 사랑했다는 사실이다.
내년 아카데미상을 노리는 할리우드 대작이 극장 문을 두드리는 가운데, 6일 ‘나폴레옹’과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이 개봉한다.
프랑스 대혁명기의 전쟁영웅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웬만한 한국사 인물보다도 우리에게 더 낯익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이 영웅은 심지어 술 이름이나 제과점 이름으로도 쓰였다. 알다시피 포병장교였던 나폴레옹은 과감하고 천재적인 전략으로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하고 승리와 명망에 힘입어 황제의 지위에까지 오르지만, 결국은 군사를 잃고 섬에 유배돼 쓸쓸한 최후를 맞는다.
번스타인은 우리에겐 나폴레옹 보다는 덜 알려져 있으나, 음악사에서 손꼽히는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미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예술가다. 일찍부터 천재적 음악성을 발휘한 그는 하버드와 필라델피아 커티스 음악원에서 수학했고, 뉴욕 필하모닉 부지휘자로 일하다가, 브루노 발터가 아파 예정된 지휘를 못 하게 되면서 대신 지휘봉을 잡았다. 그가 대중의 명성을 얻게 된 순간이다. 정통 클래식 음악가이지만 뮤지컬 작품인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썼고, 뉴욕 필 지휘자 시절엔 ‘청소년 음악회’로 친근한 방식으로 대중에 음악을 전파했다.
지금도 회자하는 살아있는 역사 속 인물인 두 남성에 대해 두 명 감독은 새로운 접근법으로 그들이 사랑한 여성을 택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호아킨 피닉스)의 전쟁과 그가 사랑한 조제핀(버네사 커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스콧 감독은 “사람들이 여전히 나폴레옹에게 매료되는 이유는 그가 매우 복잡 미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감독은 전투 장면만큼이나 복잡다단한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려 애썼는데, 이는 호아킨 피닉스에게 나폴레옹의 역할을 맡긴 이유일 것이다.
‘조커’, ‘보 이즈 어프레이드’ 등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 피닉스는 전쟁터에선 강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선 폭군이면서 동시에 순한 양인 양면성을 보여준다.
이런 호아킨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건 상대인 조제핀 역의 커비가 있기 때문이다. 조제핀은 나폴레옹과 결혼하고도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이후엔 나폴레옹의 사랑을 갈구했으나 버림받는 비운의 황후다. 나폴레옹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핑계와 정치적 이유로 조제핀을 버리고 오스트리아 공주와 결혼하는데, 그러고도 죽을 때까지 조제핀과 서신을 통해 사랑의 메시지를 교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커비는 나폴레옹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유혹하고선 무시하고, 그러다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조제핀의 감정을 절묘하게 드러내며, 때론 피닉스를 압도하는 매력을 내뿜는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발 앞에 무릎 꿇려도 조제핀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커비는 “굉장히 강인하고 막강한 에너지를 지녔음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여인에게 연민을 느꼈다”고 캐릭터에 대해 밝혔다.
커비가 아니라면 이 영화는 대규모 전투 장면이 화려한 흔한 전쟁영화에 불과했을 터다. 우리나라 관객에겐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통해 금발 미녀 이미지를 각인시킨 커비는 이 영화를 통해 얼굴이 전부가 아닌, 아카데미가 주목해야 할 배우임을 증명한다.
나폴레옹에게 조제핀이 있다면 번스타인에게는 아내 펠리시아 몬테알레그레 콘 번스타인이 있었다. 브래들리 쿠퍼 감독은 번스타인의 생애에서 “가장 흥미롭고 공감이 갔던 부분은 레니(번스타인)와 펠리시아의 결혼생활이었다”고 했다.
번스타인과 배우였던 펠리시아는 젊은 시절 함께 빛났지만, 결혼 후 펠리시아는 가족을 돌봐야 했고 번스타인은 점점 젊은 남자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펠리시아는 번스타인의 흔들리는 영혼이 창조성을 잃지 않도록, 그가 남자들을 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묵인했고, 내면은 서서히 숨쉬기 힘든 수면 밑으로 침몰해 간다.
흑백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고전적인 원근법과 공간을 오가는 현대적 부감 샷의 조화 속을 통해 초반 강렬함으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영화의 힘이 빠지고 긴 시간을 축약한 듯 야이기의 흐름에 아쉬움이 늘지만, 배우들의 연기만은 끝까지 힘을 잃지 않는다.
감독이면서 동시에 번스타인역을 맡은 쿠퍼는 마치 번스타인처럼 지휘자의 열정을 훌륭하게 재현해 낸다. 그는 어릴 때부터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지휘봉을 들고 지휘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미 아카데미상 연기상 후보로만 네차례 오른 쿠퍼의 연기가 뛰어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선 번스타인 뒤의 고독한 여인인 펠리시아를 연기한 캐리 멀리건이 더 눈에 들어온다. 수영장 신과 몇몇 클로즈업 장면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스타 이즈 본’에서 가수 레이디 가가를 영화배우로 탈바꿈시킨 쿠퍼는 다시금 자신과 함께 멀리건을 유력한 ‘아카데미 후보’ 반열에 세운다.
두 영화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시장에서 큰 힘을 가진 ‘애플티비(TV+)’와 ‘넷플릭스’가 오스카에 대한 열망을 담아 제작비를 지원했다. 개봉과는 별도로 나폴레옹은 애플티비를 통해 극장판(2시간38분) 보다 무려 92분이 더 긴 감독판(4시간10분)이 공개될 예정이며, ‘마에스트로 번스타인’은 넷플릭스를 통해 오는 20일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