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수주의자가 될 때가 있다. 주변에서 만나는 교사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주배경아동의 언어 수준에 따라 개별 한국어 지도가 필요하다.” 동의한다. “이주배경아동이 놀 공간이 필요하다.” 일정 부분 동의한다. “이주배경아동의 학교 급식 적응을 위한 메뉴도 있으면 좋겠다.” 이상적이지만 가능할까? “이주배경아동의 신체 건강을 지원해야 한다.” 그건 부모 역할 아닌가?
아이들을 배려함에 이주배경아동이라고 차별하지 않는 교사들을 좋아하고 공교육을 신뢰한다. 하지만 신체 건강까지 얘기하면 나는 보수인가? 자문하게 된다. 분위기 깨고 한마디 보탠다. 외국인이라도 그건 부모의 역할이라고.
아이들 교육과 치료를 위해 부모의 면담을 요구하면서부터 일이 험난해진다. 전화를 받지 않고 아이들만 보낸다. 문제의 원인은 부모의 돌봄과 관심의 부재인데 교육이나 치료 효과를 위해 부모가 들어야 할 이야기는 외면한다. 아이를 생각하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고 부모를 생각하면 중단하고 싶다. 아이의 문제는 개선되지 않고 부모책임에 대한 소신만 굳건해졌다.
2023년을 사는 우리는 아이를 혼자 방치하는 건 아동학대로 알고 있고, 성인도 행복을 위해 ‘워라밸’을 추구한다. 외국인 부모들은 자국에 있던 아이를 데려다 어렵사리 한국학교에 편입시켜 놓고 힘겨워하는 아이를 뒤로하고 야간과 주말까지 빈틈없이 일한다. 근면, 성실이라는 1970년대 개념으로 사는 것 같다. 지역사회에 장기체류하고 있으나 동시대를 산다고 할 수 없다. 아이들이 이대로 정착한다면 건강하게 성장할까, 우려된다.
출생률 저하와 생산인구 감소로 곳곳에서 이주민의 정주를 환영하고 이주배경아동의 정착에 관심을 기울인다. 일자리와 가족 단위 체류를 제시하는 지방도 있다. 좋은 일이지만 보수를 자처했으니 한마디 더 보태련다.
우리 사회가 아동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사회적 돌봄을 잘 감당해도 부모가 해야 하는 몫이 있다. 안전한 주거에 함께 살면서 적합한 의복과 식사를 제공하고 애정이 깃든 보호와 인생 모델이 되는 것은 부모만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장시간 노동해서 온 가족이 척박한 생활에 머무는 것에 그친다면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 너무 크다. 부모의 책임에 앞서 책임을 다하도록 환경을 만드는 사회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한 사람의 노동자를 초대할 때 부모로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초대에 좀 더 무거운 책임감을 담았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정착을 바랄 때 좀 더 세심한 정책들이 서로 연결되면 좋겠다.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