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고 상처 있는 팩션이 될 수 없는 역사 존재 정치 도구화·사회분열 야기 결국 공동체 패배로 이끌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했다”, “적절한 유머가 좋았다”, “완급조절이 뛰어났다”는 평은 역사영화에 대한 칭찬일까? 감독은 ‘서울의 봄’에 대해 때로는 ‘영화로서만 봐달라’고 했고, 때로는 ‘진압군의 입장을 밀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것은 역사를 영화로 만드는 창작자의 딜레마일까. 영화 마케팅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가당착일까. 아니면 이 또한 의도된 영화 흥행 전략일까.
역사영화에 대해 ‘다큐멘터리’ 운운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영화가 볼거리로 전락했다는 방증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하이퍼리얼리티는 역사와 영화를 혼동케 한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역사를 알게 됐다고 착각한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허구 앞에서 관객은 ‘진짜 분노’를 느낀다. 정의로운 민주시민의 자격이 영화 한 편 본 것으로 주어진다. ‘자격’은 분노 지수로 판가름 난다. 스마트워치로 ‘심박수 챌린지’를 하고, 결과를 SNS에 올리는 것은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참여한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영화 한 편이 도덕적 우월감과 정치적 효능감마저 부여하는 것이다.
역사는 온전히 재현될 수 없다. 역사가 블록버스터급 액션 영화로 스펙터클화되면, 관객은 이 스펙터클을 소비하게 된다. 영화의 극적 장면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영화의 내러티브를 거리두기 없이 열심히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관객은 역사에서 멀어진다. 역사적 진실 또한 소외된다. 고통의 사건이 영화로 소비되었기 때문에 진짜 역사는 잊힌다. 영화를 통해 적절하게 분노와 고통을 지불하였으므로 집단외상의 역사는 희석된다.
극 중 ‘전두광’은 블록버스터 영화의 광기 어린 빌런 캐릭터와 다름없었다. ‘전두광’이라는 이름 또한 이 광기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태신’은 전두광을 향해 군인도, 인간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명대사로 회자된다. 그리고 ‘전두환’을 평가하는 말로 치환된다. 관객에게 전두환은 인간 아닌, 희화화된 광기의 인물로 표상된다.
실제 전두환은 광인이나 괴물이 아니다. 전두환은 ‘전두-광’이 아니다. ‘전두환’을 ‘전두광’이라는 캐릭터로 소비하면 진짜 전두환을 망각하게 된다. 진압군은 인간 아닌 괴수와 싸운 것이 아니다. 12·12 군사반란은 절대악과 절대선의 대립이 아니다. 이분법 속에서 전두환을 ‘비인간’, ‘광인’으로 둔갑시키면 역사의 맥락에서 그를 단죄할 수 없게 된다. 전두환을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치밀하게 평가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이미 전두광을 통해 전두환을 안다고 믿어 버렸기 때문이다.
웰메이드 서사 속에서 진압군의 비극을 관람한 관객은 그들을 ‘이해’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그들 가족의 후일담을 찾아나선다. 관객의 욕망은 언론과 유튜버의 상품성 있는 콘텐츠 생산으로 이어진다. 영화를 보고, 희생자와 그들의 삶을 구경하는 것을 역사에 대한 통찰로 여기게 된다. 역사가 소화 가능한 콘텐츠로 전환될 때 역사적 진실은 더 깊이 묻히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의 무의식에 더 깊이 파고든다. 전두광이 유행가를 부른다. 전두환이 불렀다는 ‘방랑시인 김삿갓’이다. 전두광과 전두환을 겹치게 만든 것은 단지 노래만이 아니다. 영화는 더 교묘하게 화면의 색감과 질감을 바꾸고 댜큐멘터리 효과를 낸다. 실존 인물의 이름을 바꾸고 허구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므로 단편적 사실 또한 거침없이 활용된다. 영화가 더 ‘역사처럼’ 묘사할수록 ‘역사’에서 더 멀어지게 된다.
‘팩션(faction)’이 될 수 없는 역사가 있다. 극적 흥미를 위해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섞는 것 자체가 비윤리적인 창작 행위가 되는 경우가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 여전히 상처가 도사리고 있는 역사는 팩션이 될 수 없다.
‘서울의 봄’을 블록버스터 액션 누아르로 간주하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게 되면 영화적 흥미는 떨어진다. 선명한 선악 구도에, 악의 괴수화, 선의 영웅화는 더 이상 그 자체로 흥행 코드가 될 수 없다. ‘서울의 봄’을 즐기기 위해서는 ‘역사’가 필요하다. ‘서울의 봄’은 영화적 재미를 위해 역사를 콘텍스트로 소비시킨다.
‘서울의 봄’은 제작과 마케팅에 성공한 영화다. 이를 벤치마킹한 아류가 속속 생산될 것이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스펙터클로 환원시킨 영화, 액션 누아르 장르 관습을 그대로 차용한 영화, 영웅과 악당의 이분법으로 역사적 죄인을 괴물이나 광인처럼 왜곡시킨 영화, 관객의 분노를 이용하는 영화, 역사를 영화의 콘텍스트로 소비하는 영화, 웰메이드 플롯으로 카타르시스와 종결감을 선사하는 영화, 정치인과 정치유튜버에 의해 도구화되는 영화, 영화와 정치인 사이에 홍보의 순환이 일어나는 영화, 정치적 도구화로 소모적인 사회 분열을 파생시키는 영화, 그리고 그런 주변 소음이 오히려 마케팅으로 수렴되는 영화. 이런 영화의 성공은 결국 공동체의 패배가 된다.
역사의 진실은 결코 그 전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역사영화는 재현의 실패에 성공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 이 딜레마가 무수한 질문을 토해낸다.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지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역사에 내재한 고통을 증언하는 영화, 관객에게 스스로의 정치적 무능함을 일깨우는 영화가 절실하다. 어떤 관객은 정말로 그런 영화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런 영화는 그 자신이 역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