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 사건 축적으로 인식 에피소드 많을수록 길게 느껴져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살 확률도 높아
1년에 5분의 1가량은 엄마가 있는 제주도에서 보낸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서울에서보다 0.8배 정도 느리게 흐른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시간을 조금 더 다양하게 쓰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일(글쓰기)-일-일로 채워 넣은 서울에서와 달리, 제주에선 글 쓰는 시간을 낮으로 몰아넣고 저녁엔 바다를 보든, 엄마와 맛집을 가든 조촐하게나마 기록할 만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덕분에 매일매일에 다른 바람이 분다. 일할 때의 시간이 하나의 이미지로 ‘퉁’ 쳐진다면, 새로운 경험을 할 땐 이미지들이 각각의 서사로 힘을 발휘하면서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정재승 뇌과학박사는 ‘알쓸신잡’에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사건’의 축적으로 인식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새로운 사건이 많았다면 같은 시간도 길게 느껴지지만, 새로운 사건이 없으면 시간이 굉장히 짧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자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롭게 인지하는 정보량이 줄어들고 비슷한 삶의 루틴이 반복하면서, 에피소드로 기억될 만한 삶의 스냅샷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흐르는 시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일인가. 제주에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똑같은 시간을 조금 더 길게 살아내는 법’에 대해 고민해 본다. 여기서 말하는 똑같은 시간은 알다시피 1년 365일, 1일 24시간, 1시간 60분으로 흐르는 물리적 시간이다.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은 그러나 공평하게 흐르진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왜 그렇게 쏜살로 가버리는지. 반대로 하기 싫을 일을 할 때 시간은 왜 그리 게으름을 피우는지. 이처럼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시간 감각을 ‘카이로스(kairos)’라고 한다. ‘크로노스(chronos)’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의미를 부여해 주는 나만의 시간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으로 불린다. 앞머리는 길고 풍성한 데 반해 뒤쪽은 민머리이고, 등과 두 발목에 날개가 달린 카이로스의 외양에 힌트가 있다. 카이로스를 잡으려면 방법은 하나. 마주하고 있을 때 머리채를 붙잡아야 한다. 뒤돌아 날아가려 할 때 잡으려 하면? 어이쿠, 민머리라 잡을 수가 없네. 기회는 왔을 때 잡지 않으면 달아난다는 의미다. 로마인들은 이 신을 오카시오(Occasio)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기회(occasion)의 어원이 여기서 왔다.
그러고 보면, 사람 인생의 변화를 이끄는 변곡점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것이 뜻하지 않게 다른 길을 열어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당시엔 그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깨닫게 된다. 그것이 ‘기회’였음을. 흥미롭게도 장동선 뇌과학자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크로노스의 시간에도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한다. 새롭고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게 동기부여의 메커니즘이기도 하고, 즐겁게 산 시간이 몸의 대사에도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죠. 행복할 수 있는 경험을 놓치고 틀에 박힌 삶만 살아간다면 크로노스의 시간도 다 살지 못할 수 있어요.”
다가올 2024년 달력 앞에서 시간을 느리게 보낼 법을 강구하고 있는 내게 친구가 한마디 툭 던진다. “플랭크를 해봐. 1분이 5분 같을 거야.” 처음엔 웃고 넘겼는데 나쁘지 않다. 그 시간이 쌓여 탄탄한 근육이 생긴다면? 의미 있게 보낸 시간의 흔적을 눈으로 만날 수 있을 테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삶은 변화 없이 그저 흘러버린다. 무의미한 일상이 반복되면 기억할 것이 남지 않는다. 이 얼마나 허무한가. 내년엔 삶에 조금 더 많은 마디를 만들어 보자는 다짐을 해 본다. 1년은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 시간의 결과는 결코 같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