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탄생지’ 베들레헴…트리·캐럴 없이 침울한 성탄절

매년 성탄절 붐비는 곳…전쟁으로 애도 분위기
“예수 오신다면 가자지구 돌무더기서 날 것”
“어느 때보다 중요한 성탄절…평화와 사랑 필요”

성탄절이 다가오지만 예수 탄생지로 알려진 요르단강 서안의 도시 베들레헴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이 두 달 넘게 이어지면서 슬픔과 애도로 가득찼기 때문이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와 뉴욕타임스(NYT) 등은 23일(현지시간) 성탄절을 앞둔 베들레헴의 우울한 분위기를 전했다.

 

해마다 성탄절이면 베들레헴에서는 화려한 트리 점등식과 드럼·백파이프 연주자의 퍼레이드 등으로 떠들썩한 기념 행사가 진행된다. 구유 광장(Manger Square)이나 시장 등 거리 곳곳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순례객과 여행자로 북적이며, 캐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아이들은 산타에게서 사탕을 받고 기뻐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하지만 올해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트리나 불빛 장식, 퍼레이드, 캐럴 등 어느 것도 찾아볼 수 없고 어둡고 침울한 공기만이 도시를 감싸고 있다.

지난 18일(현지시간) 요르단강 서안지구 베들레헴에 있는 루터교 성탄교회 안에 설치된 성탄 맞이 예수 구유장식. 팔레스타인을 상징하는 검은색과 흰색의 '카피예'에 싸인 아기예수상이 가자지구의 폐허를 상징하는 건물 잔해 속에 누워 있다. UPI연합뉴스

베들레헴에서 불과 70㎞ 떨어진 곳에 있는 가자지구에서만 2만명이 넘게 숨진 상황에서 아무도 성탄절을 기쁘게 맞을 수 없게 됐다. 대부분 축하 행사는 취소되거나 대폭 축소됐다. 베들레헴시는 가자 주민들과 연대하는 의미로 올해 공개 기념행사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예루살렘의 여러 교회 총대주교와 수장들도 지난달 성명을 내고 신도들에게 “불필요한 축제 활동은 자제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들은 축하 행사 대신 “목회 활동과 성찬 의식에서 성탄절의 영적 의미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의 여정을 기려 예루살렘부터 베들레헴까지 이어지는 가톨릭 총대주교의 행렬도 규모가 크게 줄었다. 보통은 30명에 가까운 보이스카우트들이 백파이프를 연주하며 총대주교와 함께 시내를 돌지만 올해는 소수의 대원이 악기를 연주하는 대신 평화를 비는 성경 구절과 가자지구 어린이들의 사진을 들고 묵묵히 행진하기로 했다.

 

예수 구유 장식에도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베들레헴의 한 복음주의 루터교 교회는 아기 예수가 팔레스타인을 상징하는 검은색과 흰색의 체크무늬 두건 ‘카피예’에 싸여 가자지구를 상징하는 부서진 벽돌과 시멘트 조각 사이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구유 장식을 꾸몄다. 이 교회의 문테르 이삭 목사는 “오늘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며 “오늘 예수가 온다면 그는 가자지구의 돌무더기에서 태어날 것이다. 이것이 팔레스타인의 성탄절 모습이고 진정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이삭 목사는 유대 왕 헤롯의 박해를 피해 만삭의 성모 마리아가 남편 성 요셉과 함께 예루살렘을 떠나 이집트로 가다가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는 복음서의 이야기가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예수 역시 고난 속에 태어났고 학살에서 살아남아 난민이 됐다”며 “이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23일(현지시각) 요르단강 서안지구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탄생 교회 인근 구유 광장에서 한 여성이 가자지구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그리스도 성탄화 앞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 AP뉴시스

베들레헴이 있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도 이번 전쟁의 여파로 긴장이 높아지면서 올해 성탄절에는 외부 방문객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수 탄생 기념성당에는 몇몇 기자와 소수의 순례자외에 거의 인적이 끊겼다. 이전엔 예수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동굴을 보러 온 사람들이 몇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던 곳이다.

 

성탄절을 낀 연말 휴가철 관광 수입에 크게 의지하는 베들레헴은 이번 전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한나 하나니아 베들레헴 시장은 “경제가 마비됐다”고 말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거의 매일 폭격 소리를 듣게 된 레바논 남부도 비슷한 상황이다. 레바논 남부 국경에 있는 기독교도 마을 클라야는 성탄절 즈음이면 외국에 사는 가족과 친인척들이 돌아와 활기를 띠었지만, 올해는 마을 인구의 60%만 남아있다. 해가 진 뒤에는 거리를 오가는 사람조차 보기 힘들다.

23일(현지시각) 요르단강 서안지구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탄생 교회 인근 구유 광장에서 한 여성이 어린이와 함께 가자지구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그리스도 성탄화 앞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 AP뉴시스

남편과 둘이 이 마을에 사는 와나(67)는 “크리스마스 기분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자녀들은 베이루트와 외국에 나가 살고 있지만 우리는 집에 남겠다. 여기서 죽더라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들레헴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라미 아사크리에는 이런 상황일수록 성탄절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사크리에는 “사람들은 우리가 성탄절을 취소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기념행사만 취소한 것이지 미사는 드린다”며 “우리는 어느 때보다 크리스마스 메시지가 필요하다. 평화와 사랑, 빛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