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속 아기 안고 뛰어내린 아빠… 가족 먼저 탈출시킨 아들

성탄 새벽 도봉구 아파트 화재

4층 가족 엄마·두 아이는 무사
30대 남 2명 사망… 부상 30명

10층 거주 30대… 119 최초 신고
노부모·남동생 깨워 대피시키고
11층서 발견돼… 이웃들 눈시울

3층서 발화… 위층으로 순식간 번져
대피 중 다수 넘어지고 연기 흡입

전선합선·가스 불 등 원인 추정
경찰 26일 합동 현장감식 진행

연휴 마지막 날이자 성탄절인 25일 새벽 서울 도봉구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2명이 숨지고 30명(3명 중상·27명 경상)이 다쳤다. 화마는 7개월 아기를 안고 1층으로 뛰어내린 30대 아빠와, 가족을 먼저 대피시키고 뒤따르던 30대 남성의 목숨을 앗아갔다.

연휴 마지막 날이자 성탄절인 25일 새벽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화재가 발생해 30대 남성 2명이 숨지고 36명이 다쳤다. 사진은 이날 오전 4시 57분쯤 아파트 건물 3층 내부에서 시작된 불이 위쪽으로 번지는 모습. 소방재난본부 제공

전날 밤부터 내린 새하얀 눈이 아파트 단지를 뒤덮은 가운데 이날 새벽 발생한 화재로 23층 아파트의 외벽은 15층 너머까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최초 화재가 발생한 3층과 그 위층인 4층은 유리창까지 모두 산산조각이 나 긴급했던 당시 상황을 드러냈다. 화재 당시 정신없이 대피한 탓에 겉옷도 챙겨 입지 못한 채 잠옷 차림으로 대피한 이들은 처참히 전소하거나 소실된 아파트 내부를 바라보며 황망해 했다.

 

화재가 발생한 아파트 13층에 거주하는 권모(51)씨는 “새벽 5시에 둘째 아이가 깨워서 부랴부랴 옷을 입고 현관문을 여니 연기가 이미 자욱하고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며 “관리사무소에 연락하니 나가지 말고 집안에서 대기하라고 해서 살았는데, 이웃들 사망 소식에 마음이 아프다”며 애도했다. 오전 5시쯤 인근 천변에서 화재를 목격한 서울 도봉중학교 학생 이하랑(15)군은 “멀리서 봤을 때 뿌연 연기가 하늘까지 꽉 채워서 안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가까이 오니 탄내가 가득했는데 돌아가신 분이 나와 너무 안타깝다”고 전했다.

검게 그을린 외벽 25일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고층 아파트 3층에서 시작된 불로 30대 남성 2명이 숨지고 3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화재로 해당 아파트 외벽은 15층 너머까지 새까맣게 그을렸다. 연합뉴스

구청과 소방 당국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57분쯤 도봉구 방학동의 한 고층 아파트 3층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소방 당국은 차량 57대와 인력 220여명을 동원해 화재를 진압하고 주민 200여명을 대피시켰지만, 30대 남성 2명이 끝내 숨지고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부상자들은 대피 과정에서 넘어지거나 연기를 흡입하는 등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병원으로 옮겨졌다. 불길은 오전 6시37분쯤 대부분 잡히기 시작해 신고 접수 약 3시간43분 만인 오전 8시40분쯤 완진됐다.

 

경찰은 화재 현장에서 범죄 혐의점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26일 합동 현장감식을 진행할 방침이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화재 근원지인 3층 집이 전소된 관계로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는 데 장시간 소요될 전망이다. 소방 관계자는 “화재 현장이 전소되는 경우 모든 것이 타버리고 남은 잿더미 속에서 원인을 찾아내기 굉장히 어려워 수일이 소요될 수 있다”며 “전기 합선이나 가스 불 등 화재 원인이 다양하므로 합동 감식을 통해 현장 증거를 하나씩 발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연휴 마지막 날이자 성탄절인 25일 새벽 서울 도봉구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불이 나 2명이 숨지고 36명이 다쳤다. 사진은 이날 사고 현장의 모습. 연합뉴스

이날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각 발생한 화재로 끝내 숨진 2명 중 한 명인 박모(33)씨는 아내 정모(34)씨와 함께 두 아이를 지키려고 4층에서 밖으로 뛰어내리면서 사망한 것으로 조사돼 안타까움을 더했다.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7개월 된 둘째를 이불로 감싸 안은 채 함께 뛰어내리며 아기에게 가해질 충격은 최소화됐지만, 정작 박씨는 추락 후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돼 끝내 숨졌다. 아내 정씨는 두 살배기 첫째 아이를 재활용 쓰레기봉투 더미 위로 던진 후 뒤이어 자신도 쓰레기 포대 더미 위로 몸을 던져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현재 아내 정씨와 두 아이는 다행히 위급 상황을 벗어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또 다른 사망자인 임모(38)씨는 10층 거주자로, 11층 계단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경찰 등에 따르면 숨진 임씨는 이번 화재의 최초 신고자로, 임씨는 119 신고 후 함께 있던 70대 부모님과 남동생을 먼저 내보내고 가장 마지막으로 탈출하면서 많은 연기를 흡입해 질식사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임씨가 먼저 탈출시킨 그의 어머니와 남동생은 연기를 흡입해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으나, 생명이 위중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같은 아파트 단지 주민 이모(27)씨는 “이 동네에서 20년간 살면서 화재 한 번 없었는데 사망자까지…마음이 너무 안 좋다”며 말끝을 흐렸다.

서울 도봉구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2명이 숨지고 36명이 다쳤다. 오후 8시쯤 사라지지 않는 연기 냄새와 잿더미를 피해 집밖으로 나온 주민들과 인근 주민들이 화재 현장을 올려다 보고 있다. 김나현 기자

연이은 비극 속에서도 희망적 소식도 들려왔다. 숨진 박씨와 임씨 외에 20층 현관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이송됐던 70대 여성은 극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같은 층 이웃 주민 우모(48)씨는 “화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께서 문을 열고 나갔다가 연기가 너무 심하니 다시 현관문을 못 찾으셨다고 들었다”며 “매일 뵙는 분이었는데 못 볼까 봐 걱정했는데, 할머니께서 중환자실에서 회복됐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다. 불이 난 3층 집 거주자인 70대의 부부 2명도 밖으로 뛰어내려 위기를 모면했다. 이들은 연기 흡입으로 인해 심폐소생술 후 병원으로 이송됐다.

 

도봉구청은 이날 현장에 통합지원본부를 꾸려 구호물품을 배포하고, 이재민 지원에 나섰다. 이날 오후 3시30분쯤까지 연기, 그을림 등 28건의 피해가 접수됐고, 해당 아파트의 7세대가 임시숙소를 신청했다. 피해 주민들은 이날 밤 늦게까지지도 집안에서 빠지지 않는 연기와 공동현관에 자욱이 남은 잿가루 등으로 인한 피해를 토로했다.

화재 현장 근처에 위치한 경로당에 차려진 임시 대피소의 불이 오후 9시에 이르러서도 환히 켜져 있다. 오후 6시쯤 구청 직원들이 떠난 후에도 늦은 밤 피해 주민들이 행여나 방문할까 같은 단지 주민 세 명이 대피소를 지키고 있다. 김나현 기자

오후 8시쯤 임시 대피소를 찾은 16층 거주민 모녀는 “연기 냄새가 아직도 너무 지독해서 머리가 아파서 임시 숙소를 알아보러 나왔다”며 “가족들과 상의해서 친구 집에 갈지, 구청이 마련한 숙소로 갈지 정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13층 거주민 권모 부부도 “하루 종일 환기를 시켰지만 매캐한 냄새가 그대로다”라며 “현관마다 잿더미가 자욱해서 온집안에 신문지를 깔아둬야 한다”고 토로했다. 구청은 도봉구 내 모텔 세 곳에 임시숙소를 마련하고, 자택이 전소되거나 남은 연기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재민들을 긴급 지원 중이다.

 

이날 아파트 인근 경로당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에는 이재민들을 위한 도시락 70개와 적십자 구호물품 30박스, 기초생필품 70개 등이 우선 구비됐다. 피해 주민들은 하나둘 대피소를 방문해 비상식량을 받아 가며 서로의 안부를 살폈다. 이날 오후 6시쯤 구청 직원들이 임시 대피소를 떠난 후 늦은 밤 피해 주민들이 행여나 방문할까 같은 단지 주민 세 명이 대피소의 불을 환하게 키고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