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탄생과 소멸 ··· 살그머니 다가오는 ‘생명의 무게’

이길우·정승호 2인전 내달 7일까지
향불작가 이길우
향불로 한지 태우는 독창적 기법
감춰졌던 내면 은은히 드러내듯
그을린 흔적 새 이미지 만들어내
무대 디자이너 출신 정승호
쓰임 다한 무대 장치 자재들 활용
새 생명 불어넣어 이색 작품 탄생
그 안에 담긴 인간, 삶의 고뇌 투영

신독(愼獨). 삼갈 신, 홀로 독. 자기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삼감. 

 

‘대학’과 ‘중용’에 실려 있는 말이다. 혼자 있을 때에도 조심한다는 뜻으로,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격 완성을 위해 수양하는 방법이다.

 

이길우 ‘모자상’

‘향불작가’ 이길우의 작품 앞에 서면 유독 ‘신독’이 떠오른다. 향냄새 자욱한 연기 속에서 무덤덤히 점을 찍어간다. 한 땀 한 땀 뜸을 뜨듯 한지를 파고드는 향불의 자국이 늘어갈수록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작품 속 한지에 인두와 향불로 그을린 채 뚫려진 수많은 구멍들은 스스로를 태우고 없애는 희생으로, 뒷면을 빛내기 위한 흔적이다. 작가 이길우만이 해내고야 마는 혼의 기법이다. 

 

이길우 ‘뉴욕 노천 카페’

그는 마른 낙엽에 햇빛이 반사되는 것이 마치 타들어가는 것처럼 보여, 향으로 한지를 태우는 ‘향불 기법’을 떠올렸다. 전통 수묵화의 붓터치 대신 향불로 태우는 행위와 그로 인한 그을음은 마치 수묵화의 농담(濃淡)처럼 보인다. 몹시 독창적이다. 이 향불 기법은 수만 개의 구멍을 일일이 뚫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짧게 잡아도 수개월의 제작 기간이 요구된다. 종이가 얇아 잘못 태우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감춰진 내면을 살포시 드러내는 듯한 동양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향불이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이길우 ‘순지에 향불, 장지에 채색, 배접, 코팅’

그의 이러한 이색 기법은 사우디아라비아 알왈리드 왕자의 초상화에 적용됐다. 중국 여배우 판빙빙이 개인소장하는가 하면, 런던 사치갤러리에서의 두 차례 전시로 세계적 호응을 얻고 있다.

 

뮤지컬 ‘레베카’ ‘황태자 루돌프’ ‘엑스칼리버’ 등 대형 무대를 디자인한 정승호 작가의 새로운 도전도 아름답다.

 

그는 지난 30년간 무대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공들여 만든 무대 장치가 공연 후 곧장 버려지는 것을 보고, 이 자재들을 수집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더불어 온전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길우 ‘아이러니한 24 - 관객’

겨울에 수집한 낙엽을 건조시킨 뒤 무대 제작에 쓰다 남은 페인트와 혼합해 합판에 압착시켰다. 이를 다시 말린 후 사포로 일정 부분을 갈아낸 다음 제소(석고와 아교를 혼합한 회화 재료)를 도장하는 등 일반 캔버스의 평범함을 넘어 색다른 질감이 느껴지는 자신만의 캔버스를 완성시켰다.

 

그의 작품 속 배경이 되는 둥근 원은 우주를 뜻한다. 그 앞에 무기력하게, 그러나 때론 의지를 피력하듯 고개를 든 모습으로 선, 남자는 작가 자신이며 뒤편 그림자는 그의 자아다. 작품 ‘SHB #0001’은 생명과 존재, 우주와 자연, 과거와 미래, 유와 무, 절망과 희망 등을 나타내지만 결국 중앙부 큰 자리를 차지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삶의 고뇌와 관계 등을 토로한다.  

 

‘SHB #’으로 시작하는 그의 작품명은 ‘승호박스’, 자신의 이름과 박스형 캔버스를 뜻하는 표식이다. # 이후의 일련번호는 작품 제작 순서다. 이는 나중 작품을 구입한 콜렉터와 협의를 거쳐 새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정승호 ‘SHB #0001’
정승호 ‘SHB #0000’

‘향불작가’ 이길우와 무대 디자이너 출신 정승호가 꾸미는 2인전, ‘생명의 무게’가 내년 1월7일까지 서울 삼청동 팔판길 23, 헬렌앤제이 갤러리에서 열린다. 남북보건의료교육재단(이사장 김영훈) 기금 마련을 위한 전시다.  

 

정승호 ‘SHB #0008∼0011’
정승호 ‘SHB #0012’

인두와 향불로 한지를 태우는 이 작가 작품에는 한지의 ‘소멸’과 함께 그을린 구멍을 통해 또 다른 이미지와 색감이 드러나는 ‘생성’의 의미가 담겨 있다.

 

본인만의 캔버스 속에 ‘인간’ 실루엣을 배치하는 정 작가는 쓰임을 다해 버려지던 재료들에게 새생명을 부여한다. 그는 버려지던 무대 재료들이 새 작품으로 태어나듯, 이번 전시에서 소멸과 생성, 생과 사, 그리고 ‘생명의 무게’를 느껴보길 제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