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안정’을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던 정부가 정작 4일 발표한 ‘2024년 경제정책방향’에 물가를 자극할 수 있는 정책을 상당수 포함시켜 논란이 일 전망이다. 과일 30만t 도입 등 물가 대책이 포함됐지만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중심으로 상반기에 역대 최대 수준의 재정이 집행돼 막대한 돈이 풀리는 데다 소득공제를 통한 소비 장려 등도 수요 측면에서 오히려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각종 세금 감면 정책의 수혜자가 대기업 및 고소득자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돼 ‘부자 감세’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경제정책방향에 따르면 정부는 올해 약 250조원 규모의 신속집행관리대상사업 중 65%를 상반기에 조기집행할 계획이다. 이는 비중 측면에서는 예년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금액 측면에서 보면 역대 최대 수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올해 SOC 사업은 26조4000억원으로 전년(25조원) 대비 1조4000억원 증가했는데 상반기에 역대 최고 수준(65%)으로 집행되고, 60조원대 규모의 공공투자도 상반기 내 역대 최대 수준인 55%의 집행률을 목표로 추진된다.
문제는 이 같은 정부지출의 확대가 ‘상반기 중 2%대 물가 달성’이라는 목표에 정면으로 배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정부지출이 늘어날 경우 그에 따라 수요가 늘어나면서 물가상승 압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상반기 물가상승률이 3%대 수준을 유지하고 하반기에나 2%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이 팽배한 상황에서 오히려 상반기에 재정을 집중 투입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란 것이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하반기보다 상반기 물가가 더 높을 것으로 보이는데 정부가 상반기 지출을 늘리는 것은 고물가 상황을 더욱 장기화시켜 국민의 고통을 키울 뿐”이라고 꼬집었다. 정부가 밝힌 전기료·가스비 동결 기조도 소비를 조장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물가안정에 있어 득보다 실이 될 수 있다. 석 교수는 “공공요금 현실화가 늦어질수록 고물가 상황이 연장되고 한국전력 적자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내수 활성화 대책으로 발표된 카드사용액에 대한 소득공제 확대 방안도 실효성이 의심된다는 지적이다. 고물가·고금리 상황에 고통을 겪는 서민들보다는 소비를 늘릴 여력이 있는 고소득층 위주로 혜택이 집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서민이 소득공제 받으려고 소비를 늘리겠나. 서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관료들이 만든 정책”이라며 “차라리 카드사용 세액공제 최소금액을 낮춰주는 게 더 낫고, 이런 정책은 ‘부자감세’밖에 안 된다”고 혹평했다.
기업의 연구개발(R&D)에 대한 세제 지원 강화 등에 대해서도 ‘대기업 감세’라는 비판이 나온다. 정부는 기업의 시설 투자 세액 공제율을 한시적으로 높여주는 임시투자세액공제를 지난해에 이어 올해 말까지 1년 연장한다. 일반 R&D 투자도 올해 한시적으로 투자 증가분에 대해 세액 공제율을 10%포인트 상향 조정하며, 이에 따라 대기업의 일반 R&D 투자 증가분 공제율이 기존 25%에서 35%로 올라갈 전망이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R&D, 임시투자세액공제 연장의 수혜자는 대기업”이라며 “중소기업은 대부분 적자이고 흑자 기업은 이미 세제 혜택을 최대한도로 받고 있는 상황이라 해당 사항이 없다. 결국 대기업 지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면서 “미니예산이라 재정 여력이 없으니 올해 경제정책방향의 대부분이 ‘세제 지원’”이라며 “이는 중·상층에만 이익이 집중되고 세수 결손을 초래하는 ‘총선용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대통령실 박춘섭 경제수석은 이날 KBS에 나와 세제 혜택이 국가 재정을 악화할 수 있다는 지적에 “당장은 세수가 줄어들겠지만, 소비가 늘고 투자가 활성화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