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국민 영웅인 가셈 솔레이마니 전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의 4주기 추모식에서 발생한 폭탄테러의 사망자가 90명에 육박하면서 이란 정부가 3일(현지시간) 강력 보복을 예고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 이후 고조돼온 중동 전체로의 확전 가능성이 극대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확전 우려에 국제유가도 급등했다.
이란 국영통신 IRNA 등에 따르면 이날 솔레이마니 사령관 추모식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로 인한 사망자 수는 최소 84명이며, 부상자 수는 284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부상자 상당수가 위독한 상태로 사망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90명에 가까운 사망자는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에서 발생한 단일 테러 공격 중 최대 인명피해다. 우리 정부도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 명의 성명을 내고 “테러 공격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공격을 강력히 규탄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데 깊은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날 오후 2시45분쯤 추모식이 열리던 이란 남동부 케르만의 솔레이마니 사령관 묘지에서 700m 떨어진 곳에 주차된 차량 안 여행가방에 담겨 있던 폭탄이 원격조종으로 폭발했다. 첫 번째 폭발로 발생한 사상자를 구하려는 인파가 몰린 10분 뒤 1㎞ 떨어진 지점에서 또다시 원격으로 조종된 두 번째 폭탄이 터졌다.
테러는 누구의 소행인지 불분명한 상황이다. 테러 다음날까지도 배후를 자처하는 집단이 나오지 않았다. 이란 정부는 배후로 이스라엘을 지목하며 보복을 공언했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이날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솔레이마니 사령관 추모 연설에서 “시온주의 정권(이스라엘)에 경고한다. 당신들은 이 범죄에 대해 무거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20년 1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행정부의 드론 폭살로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 인근에서 사망한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뒤를 이어 쿠드스군의 최고지도자가 된 이스마일 카니 역시 테러 배후로 이스라엘과 미국을 지목하고 나섰다. 이란 국영방송은 이날 밤 테러 현장 인근에 모인 군중이 “이스라엘과 미국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장면을 내보냈다.
이스라엘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상황이다. 반면 미국은 확전을 의식해 자국과 이스라엘의 연루 의혹에 강하게 선을 그었다. 매튜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미국은 이번 일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이 그랬다고 믿을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미 정부 고위관계자는 이날 언론 브리핑에서 이번 폭발에 대해 “테러 공격이자, 과거에 보았던 이슬람국가(IS)의 행동 패턴으로 보인다는 게 우리의 추정”이라며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인 IS의 소행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시아파인 이란과 종파가 달라 경쟁 관계에 있는 IS는 지난해 10월 15명의 사망자를 낸 이란 시아파 사원 공격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추모식 전날 레바논 베이루트 교외에서 하마스 서열 3위의 고위 인사가 이스라엘 공습으로 사망하며 레바논의 친(親)이란 무장정파 헤즈볼라가 보복을 시사한 가운데 이번 테러로 이란에도 참전의 빌미가 주어지며 확전 우려가 이·하마스 개전 이후 어느 때보다 증폭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밀러 대변인은 이날 “우리는 (이·하마스) 갈등이 확산할 위험을 엄청나게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 정부 관리들은 헤즈볼라의 전면 참전을 막기 위해 레바논 관리들과 외교적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4일 확전 저지를 위해 중동으로 떠났다.
예멘 후티 반군의 민간 선박 공격이 이어지는 홍해도 확전에 불을 댕길 방아쇠 중 하나로 지목된다. 미국·영국·일본 등 12개국은 이날 공동성명을 통해 “후티가 계속 (홍해) 지역의 중요한 수로에서 생명과 세계 경제, 무역의 자유로운 흐름을 위협한다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미 NBC뉴스에 따르면 미 안보 당국자들은 이날 백악관에서 회의를 열고 후티 반군을 공격할 방식에 대한 여러 선택지를 논의했다. NYT도 “조 바이든 행정부 관계자들이 이제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극대화된 중동 불안에 이어 리비아 최대 유전까지 지역 시위로 가동을 중단하면서 국제유가는 일제히 반등했다. 이날 2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전날보다 3.3% 상승한 배럴당 72.70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11월 중순 이후 가장 큰 일일 상승률이다. 3월 인도분 브렌트유는 3.11% 올라 78.25달러에 마감했다.
미국 금융사 오안다(OANDA) 크레이그 얼람 수석 애널리스트는 “이날 유가 상승은 리비아 유전 시위와 홍해에서 발생한 (후티의) 추가 공격으로 인해 상승했다”고 로이터에 전했다. 하루 30만배럴을 생산하는 리비아 엘 샤리라 유전은 이날 지역 발전 문제를 둘러싼 주민들의 시위로 가동을 중단했다.
후티의 공격은 전 세계적인 무역 비용 상승도 초래하고 있다. 글로벌 해운사들이 홍해와 연결된 수에즈운하 운항을 중단하고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 주변으로 우회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서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컨테이너선이 희망봉으로 우회할 경우 이동 경로는 3000∼3500해리(약 6000㎞), 이동 기간은 열흘가량 늘어난다고 네덜란드 은행 ING는 분석했다. 이에 따라 1회 왕복 때마다 최대 100만달러(약 13억원)의 추가 연료비가 발생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가디언은 계속되는 운송 비용 증가와 유가 상승이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발생한 글로벌 공급망 병목현상이 인플레이션을 약 1% 끌어올린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다만 전직 영국 정부 무역 고문인 리스 데이비스는 “(운송비 급등이) 경제에 주는 영향은 약 12개월이 지나야 경제에 서서히 반영된다”며 “혼란이 한시적이라면 다른 인플레이션 억제 요인에 의해 묻힐 것”이라고 가디언에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