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비공(非有非空). 실상은 있지도 아니하고 없지도 아니한, 유(有)와 무(無)의 중도라는 뜻이다.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 않는 작가 박석원의 조각이 이와 닮아있다. 1980년대 전후로 시작된 그의 ‘적의(積: 쌓을 적, 意: 뜻 의)’ 시리즈는 돌이나 스테인리스, 나무를 기하학적으로 절단하고 다시 쌓아 올리는 ‘축적’ 행위가 조각 전면에 나타난다.
“조각은 근본적으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 미학”이라고 언급한 작가는 자연의 모습을 구현하는 전통 조각의 관습에서 벗어나 ‘절단’과 ‘축적’이라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으로 새로운 한국 추상조각을 구축했다. 단순한 형태를 띠는 그의 조각은 재현적 요소를 차단해 재료 본연의 물성과 구조를 강조하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 더 나아가 실존의 문제에 직면한다.
한국의 돌탑이 지닌 조형적 특성을 현대 추상조각에 연결 지어 한국 추상조각의 방향을 모색한 그의 의지는 한지라는 소재를 통해서도 성큼 발전한다. 축적과 반복의 개념은 기하학적으로 절단된 한지를 수평 수직으로 중첩시킨 평면으로 확장되며, 구체적인 형상을 드러내기 위한 매개체가 아닌 한지 자체의 물성을 강조한다. 이는 재료를 절단하고 재조립함으로써 본연의 물성을 나타내는 조각의 연장선이다. 조각가로서 물질을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분화하는 본능이 평면작업으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형식을 들여다보자. 단순한 형태의 반복은 서구 미니멀리즘과 유사한 특성을 띠지만, 산업재료가 아닌 전통적인 조각 재료를 통해 그 자체의 물성을 끄집어내며, 자연의 모습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박석원의 작품은 한국적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빚어내고 있다.
미니멀리즘은 ‘최소의, 극미(極微)의’라는 미니멀(minimal)에 ‘∼이즘(ism)’을 덧붙인 ‘최소한주의’라는 뜻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심미적 원칙에 기초를 두고 장식적인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한다. 사물의 근본만을 표현했을 때 진정한 리얼리티가 달성된다고 믿는다. 21세기 현대인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 피로감을 느껴 단순하고 간단한 형태나 구조를 선호한다.
사물의 본성을 포착해 내면의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는 박석원의 ‘적의(積意)’ 시리즈는 그것을 마주하는 관객을 묵언의 시간 속에 한없이 머물게 한다.
한국 현대 추상조각을 대표하는 박석원의 개인전이 ‘비유비공 非有非空’이란 문패를 내걸고 2월24일까지 서울 성동구 성수동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열린다. ‘적의(積意)’ 시리즈를 중심으로 16점의 조각과 14점의 평면작품을 배치해 작가의 폭넓은 예술 세계를 조명한다.
전시장에 놓인 조각과 조각들 사이 기운의 흐름도 자연스럽다. 작품에 말을 걸어보기 좋은 동선이다.
박석원은 1968년과 1969년 ‘초토’와 ‘비우’로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국회의장상을 받으며, 20대 때 이미 한국 대표작가 반열에 올랐다.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창립 멤버로 활동했다. 제5회 파리 비엔날레(1966),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1969)에 참여했다.
1993년부터 2008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의 작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대구시립미술관, 워커힐미술관, 토탈미술관, 호암미술관 등에 소장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