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가장으로서 꿈보단 먹고살아 갈 길을 개척하는 게 급선무였다. 시민 환경운동가의 길을 걷고자 했던 뜻을 잠시 접어두고 취직부터 했다. 대학 졸업 전 취득한 환경기사 1급, 이후에 따낸 환경기술사 자격 덕에 기업들이 탐내는 전문 인력이 됐다. 갓 서른에 한 대기업 현장소장을 지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환경단체 활동에 참여한 끝에 퇴사를 결심하고 환경운동에 전격 뛰어들었다.
시민 환경운동가로서의 삶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의 고리를 맺는 단초가 됐다. 시민사회에서 환경보전을 주장할 때와, 이를 청와대 비서관이 되어 환경 정책을 입안하는 것은 여러모로 달랐다. 그 일을 하며 환경 분야 전문성으로 무장한 행정가의 면모를 갖춰나갈 수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염태영 전 수원시장 얘기다.
최초의 민주당 출신 수원시장, 최초의 3선 수원시장, 현역 기초단체장으로서 최초의 민주당 최고위원 선거 당선, 그리고 수원의 특례시 승격 후 최초의 시장까지. 그의 발자취가 곧 수원에서의 민주당사(史)였다. 올 4월 총선을 앞두고 염 전 시장이 여당인 국민의힘과 격전이 불가피한 수원무 지역구에 출사표를 던진 것은 이같은 ‘승리의 역사’를 이어가겠단 자신감이 있기에 가능했다.
염 전 시장을 지난 12일 수원 영통구 망포글빛도서관 내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가 시장 시절 수원에 새로 지은 도서관 12곳 중 한 곳이다.
◆환경운동서 시작된 공직 생활
염 전 시장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세 번 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소년가장이 된 게 첫 번째였다.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취직을 서두른 것이 두 번째, 퇴사 후 시민 환경운동가로 활동하다 노무현정부 인수위원회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한 것을 계기로 공직에 입문한 게 세 번째였다.
“환경단체들이 ‘환경 비상시국’을 선언하고 서울 광화문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을 때였어요. 인수위 때 참여정부의 환경 정책 초안을 만드는 역할을 했었는데, ‘자네 같은 사람이 들어와서 일 좀 해달라’고 해서 2005년 초에 청와대 지속가능발전비서관으로 들어갔어요.”
염 전 시장의 공직 입문엔 동료 환경운동가들의 지지가 있었다. 하지만 권부의 핵심 청와대에서 환경 정책을 다루는 일은 환경운동가로 해온 일과는 많이 달랐다. “밖(시민사회)에서 얘기할 땐 당위성이 있고 방향이 맞으면 주장하면 됐지만, 공직에선 행동에 책임성을 갖기 때문”이었다. 수원시장이 되어선 그런 점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협력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과의 조화, 균형도 굉장히 중요해서 환경만을 강조할 수 없는 게 자치단체장이더라고요. 그렇지만 제가 정책 의지를 갖고 있으면 가장 확실하게 할 수 있는 것도 환경 정책이었어요. 우리가 밖에서 환경문제를 지적하고 개선하도록 요구했다면, 공적 영역에선 행정 전반을 환경적 시각에서 운영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어요. 도시계획을 하더라도 친환경적 도시계획을 하게 되고, 도서관을 하나 만들더라도 도서관과 환경이 조화롭게 자리 잡도록 하는 일들을 할 수 있는 거죠. 가장 효과적으로 환경운동을 대체할 수 있더라고요.”
◆“자치분권 노력의 구심점 될 것”
‘참여정부’ 출신답게 수원시장이 되어선 ‘참여시정’을 구현하기 위해 힘썼다. 주민 간 갈등이 유발되는 사안에 대해 ‘300인 원탁회의’ 나아가 ‘500인 원탁회의’를 열어 시민 목소리를 들었다. 시장이 직접 테이블을 오가며 시민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했다.
“시장은 시민께 봉사하고 시민이 맡긴 일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시장이 되는 순간 시민의 뜻을 저버리고, 잊어버리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쉬워요. 전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자치와 분권시대입니다. 자치는 시민에 의한 운영이거든요. 그래서 시 운영의 상당 부분을 시민 중심으로 바꿨던 겁니다.”
대한민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회장을 지낸 염 전 시장에게 자치분권 실현은 환경운동에 이은 또 다른 목표가 됐다. 자치분권의 처음과 끝은 결국 시민이란 소신은 시민의 인권을 직접 챙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전국 기초단체 중 최초로 인권담당관을 임명했다. 염 전 시장은 “시민에 의한, 시민의 자치를 우리가 열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하다.
“지자체는 이걸 일부 성공하고 상당한 성과를 만들고 있지만 그걸 가장 못 하는 데가 어디냐면 중앙정부예요. 아직도 권위와 독점적 지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습니다. 행정의 수요자인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아요. 이젠 중앙정부가 배워야 합니다. 기초 지자체 226곳, 광역 지자체가 17곳입니다. 여기는 서로 경쟁을 해요. 좋은 정책이 있으면 뒤처지지 않으려고 서로 노력해요. 그런데 중앙정부는 경쟁도 없어요. 독점, 독과점이 얼마나 우리 시장경제 체제에서 비효율적이고 일방적인지 우리는 알고 있어요.”
염 전 시장은 같은 시기 기초단체장을 지낸 김영배(전 서울 성북구청장), 이해식(전 서울 강동구청장), 민형배(전 광주 광산구청장) 의원 등과 지방자치법을 32년 만에 전부개정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들에 더해 22대 총선에 출사표를 던진 황명선 전 논산시장과 여의도 중앙정치 무대에서 “자치분권 활동의 맏형이자 구심점이 되어보겠다”는 것이 염 전 시장의 각오다.
◆“‘메가서울’은 혹세무민 ‘표’퓰리즘”
여권발 ‘메가 서울’론을 두고 자치분권론자인 염 전 시장은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는 “출발부터 메가시티의 근본 취지와 전혀 다르다”라며 “오로지 선거를 앞두고 혹세무민하는 것”이라고 질타를 쏟아냈다.
“하루아침에 선거 전략으로 던져졌어요. 지금은 국민의힘 김기현 전 대표가 ‘아웃’되니 더 이상 진척도 없죠. 처음 제기될 때부터 전형적인 혹세무민의 ‘표’퓰리즘이었죠. 선거 공약 의제일 뿐이었죠. 선거 끝나면 바로 사라지는 거죠. 수도권에서 국민의힘이 워낙 밀리니 뭔가 판을 흔들 수 있는 이슈가 필요하다고 해서 선거공학적으로 던진 거예요.”
일부 지자체는 ‘서울 편입’을 희망한다는 뜻을 서울시에 공식으로 밝히며 논의를 이어가려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염 전 시장은 “자치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자, 자신을 뽑아준 시민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당선된 자치단체장들이 결재권을 가져요. 여기서 문제가 생겨요. 행정의 일반원리를 무시하는 일들이 계속 터지고 있어요. 지방자치제를 개선해야 합니다. 대통령 선거 여파가 지방선거로 이어지는 일을 막아야 해요. 일정한 기간을 두고 지방선거를 진행해 폐단을 줄여야 합니다. 지난 지방선거 때 여러 자치단체장이 그 당(국민의힘)의 바람을 타고 당선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말도 안 되는 이슈(메가 서울)에 부화뇌동하고 있는 겁니다.”
◆“분열보다 尹정부 독주 막아야”
이낙연 전 국무총리와 일부 비주류 의원 등의 탈당 행보엔 우려를 표했다. 염 전 시장은 “가장 중요한 우리의 과제는 이번 총선에서 윤석열정부의 검찰독재, 독주를 막는 것”이라며 “그걸 이루지 못하면 우린 윤석열정부의 국정에 대한 농단과 파탄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작심 발언을 했다.
“(세계 스카우트)잼버리가 어떻게 됐나요? 국격을 기가 막히게, 어처구니없이 추락시켰죠. 부산 엑스포는 어떻습니까? 대국민 사기극이었습니다. 행정이 움직이지 않아서였습니다. 이권 카르텔과 이념 카르텔로 묶이니 공무원들이 일을 못 합니다. 그런 방향을 바로잡으려면 어쨌든 선거를 이겨놔야 합니다.”
염 전 시장은 양당제의 폐해를 누구보다 강조해 온 이다. 국민이 제3, 제4의 선택지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한국정치의 발전도 있다고 믿는다. 양대 정당의 전직 대표들이 제3지대로 나아가 신당 행보를 이어가는 것은 각 당 내부에선 분열이지만, 유권자 입장에선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염 전 시장은 다만 “다당제는 출발과 이념과 목적하는 바가 달라야 하지만, 지금은 선거를 앞두고 쪼개진 것일 뿐”이라고 현 정국을 진단했다.
“저는 다당제가 꼭 필요하고 다양한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양화한 우리 사회를 총체적으로 담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총선을 앞두고 우리 진영을, 내가 가진 집단을 좀 더 크게 하겠다는 것밖에 없어요. 선거 앞두고 내 공천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두고 이합집산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재개발, 군공항 이전 할 것”
염 전 시장은 3선 시장 출신답게 지역 현안을 소개하는 데 거침없었다. 가장 큰 현안으로는 “신도시 조성이 된 지 30년이 돼 재개발 문제가 가장 크다”고 했다. 또 하나는 “교통망 확충”이라고 했다.
“지난해 경기부지사로 있을 때 1기 신도시의 재개발이 가능하도록 한 특별법과 관련해 경기도 의견을 건의서로 정리해 국회 김민기 국토교통위원장에게 전달하고 협조 요청을 했어요. 그게 통과됐어요. 이제 가능해진 거죠. 관련 시행령과 구체적 내용들이 앞으로 나와야 해요. 또 하나는 서울로 출퇴근하는 시민을 위한 교통망, 또 시내 교통 연계성을 높인 지하철망 확충이 과제입니다.”
또 다른 과제는 단연 군공항 이전과 경기국제공항 신설이다. 그는 경기부지사 시절 ‘경기국제공항 추진단’을 만드는 일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경기남부권에 공항이 신설돼야 수출 물동량의 육상 운송 거리가 줄고, 지역민들의 공항 접근성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이 과정에서 군공항 이전 문제의 실마리를 찾고, 기존 군공항 부지에 첨단연구산업단지를 유치함으로써 수원의 질적 성장을 이루겠다는 각오다.
“앞으로 경기 용인을 중심으로 SK하이닉스와 삼성 반도체 공장이 대규모로 들어갑니다. 반도체 물류 공항이 필요해요. 화물 운송 기능이 들어오면 여객 운송 등 그 외의 요소는 부수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됩니다.”
환경운동가에서 청와대 비서관, 이후 선출직 기초단체장으로서 변화무쌍한 경로를 걸어온 염 전 시장한테도 이번 총선은 처음 부딪쳐보는 도전이다. 염 전 시장은 “선공후사 정신을 워낙 젊은 시절부터 훈련받았다”며 “특히 공직에 있을 땐 헌신의 자세를 최대한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제가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할 수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인간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자세만큼은 ‘완벽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12년 수원시장을 하며, 또 1년 반 경기도에 근무하며 그런 자세를 견지해왔거든요. 20년 가까이 공직에서 일했지만 ‘공무원의 관료주의에 빠지지 않고 일해야 한다’는 자세였습니다. 눈이 오면 그 전날부터 걱정하면서 잠 못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죠.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그럴 것입니다. 정치인은 무슨 말이든 다 하지만, 말이 아닌 그 사람이 지나온 길을 보면 판단하시는 데 훨씬 도움이 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