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적 견해차에 건립·철거 반복… “사회적 합의 중요” [심층기획]

사회 갈등 ‘시한폭탄’ 동상 건립

최근 보훈부 이승만기념관 건립 추진
동상 철거 40년 만에 논란 가열 조짐
2023년 육사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시끌
동상화 된 인물 업적 놓고 평가 엇갈려
전문가 ‘공론화 통한 공감대 형성’ 강조
“‘만들고 보자’식의 건립 갈등 불씨 키워”
‘서울 광화문 광장’, ‘통영 이순신공원’. 이들 지역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는 뭘까. 대부분 ‘동상’일 것이다. 세종대왕에서 이순신 장군까지…. 동상으로 되살아난 인물들은 모두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위인’으로 평가된다. 동상이 들어선 지역은 역사 속 인물의 생애에서 큰 축을 차지한다. 동상이 세워진 후에는 다시 동상 자체가 명물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동상은 묵묵히 역사의 흐름을 내려다볼 뿐이지만, 이들을 둘러싼 논쟁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동상을 세우고 옮기고 철거하는 과정마다 갈등과 대립이 불거진다. 개인의 역사적 견해, 정치적 관점에 따라 한 인물의 공과에 대한 평가가 나뉘기 때문이다. 복잡다단한 한국 현대사에 최근 극단으로 치닫는 정치 대립이 더해지면서 ‘동상을 둘러싼 정치사회학’은 날로 첨예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충분한 사회적 합의와 상호 존중을 거쳐 동상을 세움으로써 불필요한 갈등 비용을 줄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 2023년 7월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세워진 백선엽 장군 동상. 칠곡군 제공

◆“역사 퇴행”… 동상 건립 놓고 갈등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복원 문제는 찬반 논란이 가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기존 동상이 철거된 지 40여년 만이다. 29일 인하대 총동창회 등에 따르면 이승만 동상은 1979년 인하대 교내에 높이 6.3m 규모로 건립됐으나 5년 만에 철거됐다. 당시 학생들은 독재와 친일 행적을 문제 삼으면서 민주화 시위 중 그의 동상을 밧줄로 묶어 끌어내렸다.



하지만 최근 국가보훈부가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면서 창고에 잠들어 있는 동상 역시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이 전 대통령 동상을 광화문광장에 세우겠다는 단체도 지난해 10월 발족해 활동을 시작했다.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는 지난해 7월 세 개의 동상이 세워졌다. 6·25전쟁 전세를 뒤집는 데 공을 세운 백선엽 장군과 당시 한·미 대통령이었던 이승만·해리 트루먼 동상이다. 하지만 논쟁적 인물의 동상을 호국영령이 잠든 기념관에 짓게 되면 보수의 성지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동상 제막식이 진행되는 현장 바깥에서는 집회가 벌어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50여명은 “이승만·트루먼 동상은 2017년 제작된 뒤 전쟁기념관과 주한미군마저 영내 설치를 거부해 건립 부지를 찾지 못하다가 지난 6월16일 기습 설치됐다”며 철거를 촉구했다.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홍범도 장군 흉상. 연합뉴스

◆이전·철거 놓고도 찬반 시끌

동상 이전과 철거도 갈등을 낳는다. 지난해 8월 육군사관학교는 독립군 홍범도 장군 흉상을 외부로 이전하는 문제로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육사 교내에 있는 독립운동가 6명의 흉상 이전을 발표하면서다. 흉상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3·1절에 장병들이 사용한 탄피 300㎏을 녹여 제작했다. 육사는 소련 공산당 입당 전력 논란이 제기된 홍 장군의 흉상은 육사 교정 밖으로 옮기고 지청천·이범석·김좌진 장군 등의 흉상은 교내 육사박물관 등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독립운동 유관단체는 홍 장군의 흉상 철거 백지화를 촉구했다. 24개 단체는 독립운동단체연합을 만들어 “독립운동 역사를 정쟁의 수단으로 삼거나 이념 몰이로 국민 여론을 분열시키는 모든 행위에 반대한다”면서 “홍 장군의 흉상 이전 시도를 멈춰라”고 촉구했다. 대전과 광주, 서울 등에서는 흉상철거 철회 촉구 걷기대회가 이어졌다. 400여명의 주민은 육사 앞까지 4.5㎞를 행진했다. 이들은 행진하며 “1㎝도 옮길 수 없다”고 외쳤다.

대구의 순종황제 어가길 동상은 역사 왜곡 논란 끝에 철거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구 중구는 1909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남순행 중 대구를 다녀간 것을 모티브로 삼아 2017년 동상을 만들었다. 대례복을 입고 있는 5.5m 높이의 금빛 순종 황제 동상을 만드는 데 모두 9억8100만원이 들었다.

하지만 일부 시민단체와 역사학자를 중심으로 순종의 남순행은 단순한 시찰이 아닌 조선인의 반일 감정을 없애기 위해 일제가 순종을 앞세워 대구·부산 등지로 끌고 다닌 부끄러운 치욕의 역사라는 주장이 나왔다. 대구 중구는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설명했지만 논란은 계속됐다. 결국 순종 동상은 점점 관심에서 멀어졌고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민원마저 제기됐다. 대구 중구는 2027년까지 2200억원이 투입되는 달성토성 복원사업에 맞춰 순종 황제 어가길 재정비에 나설 계획인데 순종 동상 철거를 함께 검토하고 있다.

대구시 달성공원 앞에 설치된 높이 5.5m의 순종황제 동상. 대구시 중구 제공

◆“사회적 합의 우선시돼야”

동상 건립에는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 막대한 비용이 든다. 건립뿐 아니라 이전·철거 과정에서도 유무형의 불필요한 갈등 비용이 발생한다.

전문가들은 동상 건립과 철거를 둘러싼 논란을 줄이려면 무엇보다 사전에 충분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허창덕 영남대 교수(사회학과)는 “동상을 세우고 철거하는 문제는 지역주민 간 공감대 또는 의견을 나누는 공론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특히 사유지가 아닌 공유지에 동상을 설치할 때는 사회적 합의가 절대적으로 우선시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물 동상은 정치적 우상화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으나 지역주민 합의가 이뤄졌다면 의견을 존중해 줘야 한다”며 “미국이나 유럽을 보면 관광지나 학교, 도로 등에 설치된 동상과 표지석이 국내보다 더 많고 포용적이다”고 덧붙였다.

이갑산 범시민사회단체연합회장 역시 ‘숙의 과정’이 중요하다고 봤다. 이 회장은 “역사적 인물의 공과를 놓고 동상 건립 문제를 따지다 보면 결국 국론분열을 피할 수 없다”면서 “이런 인물은 동상으로 만들더라도 훼손하거나 금방 철거되는 상황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기 때문에 ‘만들고 보자’는 식보단 지역주민과 충분히 건립에 대한 논의를 거친 뒤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