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전세피해 억울한데… 건물 관리까지 하라니

소방시설·보일러·외벽 등 훼손 불구
임대인 잠적·방치에 수리비 떠안아

두 번 우는 전세사기 피해자들

지자체 전세피해지원센터 한계
전세사기특별법 대책 명시 불구
시군구 서로 문제 떠넘기기 급급

전문가들 “근거 부재 핑계에 불과
정책 필요에 따라 지원 가능” 반박

부산 수영구에 사는 정명식(34)씨는 최근 ‘울며 겨자 먹기’로 전세사기 피해를 본 주택의 ‘소방안전관리자’가 됐다. 소방안전관리자는 건물의 소방시설을 관리하고 화재 발생 시 초기 대응을 맡는 등 소방안전관리에 필요한 업무를 수행한다.

 

통상 임대인이 이 역할을 맡는데, 이 주택은 임대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며 잠적한 탓에 임차인 중 한 명이 소방안전관리자가 돼야 했다. 소방안전관리자의 역할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임차인들은 등록을 유예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정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가 부과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정씨가 짐을 짊어지기로 했다.

부산 수영구에 있는 한 전세사기 피해 주택은 스프링클러 등 건물 내 소방시설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7월 폭우로 지하 1층이 침수되며 이곳에 있던 소방 펌프가 고장난 모습. 임차인 제공

6개월째 스프링클러가 고장 나 있는 등 건물 내 소방시설은 엉망이었다. 지난해 7월 폭우로 지하 1층에 모여 있는 건물 주요 시설이 침수되면서 수도 펌프와 소방펌프가 망가졌다. 세대 내 수도로 연결되는 수도 펌프는 임차인들이 사비 500만원을 들여 복구했지만, 소방펌프 복구에 2000만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은 임차인들은 고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30일 소방업계 등에 따르면 이런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초기 진압에 실패해 불이 커질 가능성이 크다. 주변에 있던 시민과 시설에도 손해를 끼칠 수밖에 없다. 부산시 관계자는 “소방본부를 통해 해당 주택의 안전점검을 지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계일보 취재 결과 관할 소방서는 소방시설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소방안전관리자를 등록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내야 한다며 등록 절차를 안내했을 뿐이었다.

 

전국적으로 전세사기 피해가 발생하면서 각 지방자치단체는 전세피해지원센터를 설치해 피해자 ‘원스톱’ 지원한다고 밝혔지만 ‘주택 관리’는 지원하지 않고 있다. 민간주택은 주택 소유자가 관리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전세사기 피해 주택은 임대인이 잠적한 경우가 많아 임대인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자체들이 소극적인 행정으로 전세사기 피해자와 인근 시민들의 안전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증금도 안 주는데 “임대인에 수리비 청구해라”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전세사기 피해 주택은 최근 보일러 배관이 부러지는 사고를 겪었다. 지난달 16일 강풍으로 건물 4개 층의 외벽이 무너진 데 이어 이달 15일 2개 층의 외벽이 또 한 번 무너졌다. 외벽이 떨어지면서 건물 안에 있는 보일러 배관을 부러뜨려, 보일러를 가동할 경우 가스가 누출될 위험이 높았다.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전세사기 피해 주택의 보일러 배관이 어긋나있다. 지난 15일 건물 외벽이 떨어지면서 보일러 배관을 부러뜨렸다. 임차인 제공

피해 임차인은 임대인에게 외벽을 수리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나도 (속칭 ‘건축왕’으로 불리는) 남모씨에게 명의만 빌려줬다”는 말만 들어야 했다. 진짜 임대인인 남씨에게 얘기하라는 식이었다. 결국 1차 외벽 탈락 당시 파손된 차량 2대와 2차 외벽 탈락으로 망가진 보일러 수리비는 임차인이 직접 충당해야 했다. 하지만 외벽의 경우 수리비가 3000만원에 달해 임차인들이 수리를 주저하고 있다.

 

시에 도움을 구해도 “개인이 소유한 건물을 고칠 경우 소유자의 자산이 증식되는 것이라서 도울 수 없다. 법적으로는 임차인이 고친 뒤 임대인에게 비용을 청구해야 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임차인들은 “보증금도 안 주는 임대인이 수리비를 주겠냐”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이 주택에 살고 있는 강민석(54)씨는 “일단 사람이 살 수 있게 해주고 지자체가 임대인이나 실소유주에게 비용을 청구해달라고 해봐도 ‘안 된다’고만 한다”고 토로했다.

 

인천시와 부산시는 전국에서 3번째, 4번째로 전세사기 피해자가 많은 지자체다. 이들 지자체는 각각 현장을 찾아 피해 현황을 파악하기도 했지만,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지자체들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다고 입을 모았다.

 

인천 미추홀구에 있는 한 전세사기 피해 주택 외벽이 무너져있다. 지난달 16일 4개 층의 외벽이 떨어진 뒤 이달 15일 2개 층의 외벽이 추가로 떨어졌다. 임차인 제공

실제로도 그랬다. 인천시 관계자는 “시가 운영하는 전세피해지원센터는 금융·법률·이사를 지원하고, 주택 관리는 군·구에서 담당한다”며 미추홀구에 책임을 떠넘겼다. 반면 미추홀구 관계자는 “전세사기 문제는 인천시 전세피해지원센터가 처리한다”며 전세사기 피해 지원은 광역단체 소관이라는 입장이다.

 

부산 수영구 관계자 또한 “전세사기 피해 지원은 부산시에서 한다”고 했고, 부산시 관계자는 “주택법상 정부가 민간주택은 고쳐 줄 수 없다. 국토교통부에 민간 기금 조성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광역·기초자치단체 관계자 모두 동일한 변명은 있다. ‘전세사기 피해 주택은 개인이 소유하는 민간주택이라서 주택 관리를 지원할 법적 근거가 없다.’ 

◆“법적 근거 없다”지만 특별법, ‘주거지원’ 명시

 

전문가들은 “법적 근거 부재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지난해 6월 시행된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전세사기특별법)이 국가와 지자체가 전세사기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주거지원 대책을 수립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전세사기특별법 제4조는 임차인 보호를 위해 ‘전세사기피해자에 대한 주거지원 대책’을 명시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권지웅 전세사기고충접수센터장은 “회의록을 보면 특별법이 만들어질 당시 ‘지자체가 주택 관리를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면서 “주거 지원은 주거 환경에 대한 지원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해석하는 게 적절하다”고 설명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도 “특별법은 전세사기 피해 지원책을 포괄적으로 제시해 각 지자체가 상황에 맞는 정책을 수립하게 했다”며 “지자체들은 이자 지원이나 법률 상담 등 기존 정책만 되풀이할 뿐 적극적인 피해 지원에 나서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각 지자체의 ‘민간주택은 지원할 수 없다’는 주장도 민간주택도 필요에 따라 지원하는 지자체가 있다는 점에서 핑계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 소장은 “서울시는 노후한 민간주택을 수리하는 ‘가꿈 주택’ 사업을 하고 있고, 전북 전주시와 경기 시흥시도 민간주택 수리를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소장은 “지자체들이 전세사기 피해자의 주거기본법상 주거권(안전한 주거 환경에 거주할 권리)과 인근 시민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자체의 소극적 행정 탓에 수십억원 규모의 전세사기 피해 지원 예산이 책정되고도 불용 처리되고 있다. 인천시는 지난해 확보한 전세 피해 지원 예산 63억원 중 2%도 채 되지 않는 1억1323만원을 집행했다. 인천시는 부진한 집행률을 근거로 올해 예산을 10억320만원으로 줄이기까지 했다. 지난해 관련 예산 1억6600만원 중 7800만원을 집행한 부산시는 올해 46억원을 전세사기 피해 지원 예산으로 확보했지만 주택 관리에는 쓸 수 없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