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의 삶 [편집인의 원픽]

바닥에 깔린 많은 종이들 가운데 하나를 탁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일. 흔히 언론의 역할로 불리는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의제 설정)이 그와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 뉴스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뭘까. 고민과 취재를 거쳐 우리가 내놓는 기사(어젠다)는 독자에 말을 거는 일이다. 뉴스 수명이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세계일보만의 기사를 소개한다.

 

“그냥, 이웃입니다”

 

“이 영화는 용기에 관한 것입니다.”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 한반도 전문가로 영화 공동제작자인 수미 테리 박사의 말이다. 지난달 31일 국내 개봉한 ‘비욘드 유토피아’는 두 가족의 탈북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테리 박사는 지난해 10월 미 워싱턴DC 소재 CSIS(미국전략국제문제연구소)에서 시사회를 갖기 전 언론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아들을 북한에서 탈출시키려는 엄마의 용기, 목숨을 걸고 북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김성은 목사의 용기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국내 개봉 전에 이미 미국 내 600여개 극장에 걸렸고, 미국 PBS 영국 BBC 등 해외 공영방송을 통해 방영됐다. 압록강을 건너고 험한 산악 길을 걷고 정처없이 차에 몸을 싣는 탈북자들의 동선을 카메라가 그대로 따라간다.

두 가족의 탈북 여정을 생생하게 담은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 포스터.

지난해말까지 입국한 탈북민은 3만4000여명. 이들 중 상당수가 영화처럼 숨막히고 힘든 여정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지만 안정적인 삶을 유지해나가긴 쉽지 않다. 세계일보가 창간35주년 기획으로 보도한 '먼저 온 통일' 탈북민(2월1일자·김예진·박수찬·홍주형·구현모 기자) 기사는 4인의 탈북민 정착기와 탈북민 입국 초기 정착을 돕는 전문가들 인터뷰를 통해 여전히 고군분투중인 탈북민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북한을 탈출하는 용기만큼이나 이들이 한국 사회에 안착하는데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전향미씨는 “탈북민의 남한 정착은 자존감을 되찾는 분투의 과정”이라고 했다. 

 

◆“가장 큰 도움은 이웃”

 

본지가 취재한 4인의 탈북민이 한국 사회에 정착한 과정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이 보인 근성, 열정만큼은 비슷했다. 자녀에게도 탈북민 출신임을 숨기지 않는 전향미씨나 전통 북한술을 만들어 창업에 성공한 김성희씨, 북한에서 배운 전공을 살려 토목 현장에서 일하는 허수현씨 모두 자신의 배경을 양분으로 삼아 이 곳에서 뿌리를 내렸다. 서울교통공사 5∼8호선 청소를 담당하는 업체에서 총괄 관리팀장으로 일하는 전명순씨는 입사 3년만에 팀장이 됐는데 성실함과 격의없는 대인 관계가 인정을 받았다. 전씨는 “한 직원이 제게 ‘(북한이탈주민을)안 좋게 봤는데 너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너 참 열심히 산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김성희, 전명순, 전향미, 허수현씨(왼쪽부터).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들이 안착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이들은 가족, 주변의 이웃들이었다. 북한학 연구 특수대학원에 다니는 전향미씨는 “처음엔 남편에게 (내가)북에서 왔다는 말을 뭐하러 먼저 하느냐고 말렸는데 오히려 남편이 ‘난 네가 멋지다’ ‘괜찮다’는 말을 해줬다. 누구에게나 곁에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직간접적으로 느낀 편견에 상처를 받은 김성희씨도 버틸 수 있었던 건 탈북 후 만났던 적십자 봉사자 ‘언니들’의 배려와 자신을 이웃으로 받아들여준 동네 어르신들 덕분이었다. 북한 명문대학으로 꼽히는 김책공대 출신의 허수현씨 꿈은 남북경제협력이 이뤄지면 남북 통합 지도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북한이탈주민들도 한국 사회에 잘 정착하고 우리 사회와 민족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게 그의 포부다.

 

◆“먼저 온 통일, 일상의 통일”

 

중장년 세대만해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흔하게 들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젊은 세대 대상의 여론조사에서 통일은 ‘우리의 소원’도 아니고, ‘미래의 희망’도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생존,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통일은 언젠가는 이뤄야할 목표다. 탈북민을 ‘먼저 온 통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언젠가 함께 할 북한 주민들을 만나고, 부딪히고, 받아들이는 기회를 우리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탈북민의 취업과 창업, 학교 적응 등을 돕는 전문 도우미들은 우리의 ‘열린’ 마음이 가장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북한이탈주민의 날’ 제정 관련 민간 단체 간담회를 갖고 있다.  연합뉴스

김용 남북하나재단 일자리지원부 팀장은 “탈북민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해주면 정착 몇 년 내 대부분 취약계층에서 벗어난다. 탈북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이들이 우리 이웃으로 될 수 있다는 걸 인식시켜준다면 통합은 자연스럽게 된다”고 했다. 최경옥 통일전담교육사도 “편견보다 맡기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게 통일을 이루는 과정이다. 탈북민들도 무조건 차별당할 거라는 편견을 떨치고 용기를 가져야한다”고 했다. 최향 취업전문상담사는 “(탈북민을)먼저 온 통일 국민으로서 향후 남북한간 민족 및 사회 통합을 위한 선도적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해야한다”고 강조했다. 

 

P.S. 취재한 김예진 기자에 물었습니다.

 

-탈북민 정착을 돕는 전문가들을 만나봤는데 탈북민 정착에 가장 필요한 건 뭘까.

 

“탈북민들은 언어는 같지만 체제가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다. 경제 개념, 경제 관련 인식 차이에서 빚어지는 적응상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막상 일선에서 이들을 지원해온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보니 정반대였다. 경제적 어려움보다는 언어, 의사소통 문제가 컸다. 미세한 언어 차이, 탈북민이라는 정체성을 들킬까 하는 두려움, 그로 인해 차별이나 무시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가장 먼저 말한다. 탈북민들이 지원 단체나 정부에 해줬으면 하는 교육으로 가장 인기가 많은 게 말투 교정이나 스피치 교육이다. 정착지원제도, 심리 상담 등 다양한 지원 대책이 마련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탈북민을 우리 주변의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 국민들의 연대 의식, 다문화에 포용적이고 관용적인 인식과 태도다.”

 

-누적 탈북민이 3만4000여명이라지만 본지가 인터뷰한 이들처럼 성공적으로 정착한 사례가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연착륙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꼽는다면.

 

“정부는 성공 사례를 꾸준히 발굴하고 시상하면서 모범 사례를 다른 탈북민들에게 많이 제시하려고 한다. 실제 성공한 사람들이 많지만 눈에 많이 띄지 않는 건 그만큼 탈북민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아서다. 성공 사례로 소개되는 이들을 만나보면 탈북민임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변에 다가가 도움을 구하고, 실력을 쌓아간다. 탈북민이 직업을 선택할 때 북한에서 본 남한 드라마 영향을 받아 오피스라이프 등을 추구하는 편이고 대부분 농촌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한다. 오히려 탈북민들이 북한에서의 경험을 살려 북한 전통주 등 기술을 특화하는 게 성공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정부가 ‘북한이탈주민의 날’ 제정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배경은. 

 

“현 정부는 전임 정부에 비해 통일을 강조한다. 자칫 이념대립을 촉발시키거나 북한 인권을 대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논란이 있긴 하다. 하지만 통일은 헌법상 의무다. 그러다보니 정부가 ‘먼저 온 통일’인 탈북민을 주목하는 측면이 있다. 탈북민 정책을 놓고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기 보다는 진보가 강조하는 ‘과정으로서의 통일’ 과 보수가 강조하는 ‘먼저 온 통일’로서의 탈북민 개념에 공통점이 크다는 점을 주목해 협력했으면 좋겠다. 탈북민에 대한 포용력이 시민 의식을 성숙시키고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게 정치의 몫이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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