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한 한국 축구가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한 기간이다. 2002 한일 월드컵 4강, 2010 남아공 월드컵 16강,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까지 세계 무대에서도 아시아 국가 중 최고의 성적을 자랑한 한국은 유독 아시안컵과 인연이 없었다. 한국은 1956년 제1회 대회와 1960년 제2회 대회에서 2연패를 이룬 뒤로는 단 한 번도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우승컵을 들어 올린 이때도 참가팀이 4개국에 불과했던 시절이다.
이런 한국은 이번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무관 저주’를 풀어낼 것이라는 기대감을 모았다. ‘캡틴’ 손흥민(31·토트넘), ‘괴물 수비수’ 김민재(27∙바이에른 뮌헨), ‘축구 천재’ 이강인(22∙파리 생제르맹) 등 이름값 높은 유럽파가 포진한 ‘역대 최고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을 이끄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도 “한국 수준의 팀에게 64년의 세월은 너무나 길다. 팬들에게 우승을 선물하겠다”고 공언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클린스만호의 자신감은 공염불에 불과했다. 한국이 아시안컵 준결승에서 졸전 끝에 탈락하며 무관의 세월을 ‘67년’으로 연장했다.
한국은 7일(한국시간) 카타르 알라이얀의 아흐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카타르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요르단에 0-2로 완패했다. 패스 실책을 연발하며 상대 역습에 맥을 못 추렸고, 유효 슈팅을 단 한 개도 기록하지 못할 만큼 공격력도 처참했다. 한국이 요르단과 A매치에서 패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한국은 전반부터 답답한 경기력을 노출했다. 수비의 핵심이던 김민재가 경고 누적으로 인해 결장한 것이 뼈아팠다. 김민재가 빠진 중앙 수비진엔 김영권(33)과 정승현(29∙이상 울산)이 섰고, 좌우 측면 수비는 설영우(25∙울산)와 김태환(34∙전북)이 맡았다.
클린스만 감독은 박용우(30∙알아인), 황인범(27∙즈베즈다), 이재성(31∙마인츠)를 미드필더로 내세워 중원 싸움에서 수적 우위를 가져가려 했지만, 답답한 백패스만 남발했다. 이 과정에서 요르단의 빠른 압박에 공을 빼앗기며 위기를 수차례 자초했다. 골키퍼 조현우(32∙울산)의 선방쇼가 없었다면 전반부터 대량 실점을 내줄 뻔했다.
0-0으로 전반을 아슬아슬하게 끝낸 클린스만호는 별다른 변화 없이 후반을 시작했고, 기어이 실점을 헌납했다. 후반 8분 박용우가 전달한 백패스를 요르단의 알타마리가 차단한 뒤 침투 패스를 찔러 넣었고 알나이마트가 조현우를 넘기는 오른발 칩슛으로 선제골을 완성했다. 후반 21분엔 상대 진영에서 이강인(파리 생제르맹)이 황인범에게 준 패스가 차단당하면서 또 요르단의 역습으로 이어졌고, 알타마리가 화려한 드리블로 한국의 수비진을 제친 뒤 페널티 아크에서 왼발 슛을 꽂아 추가 골을 터뜨렸다. 조별리그부터 준결승까지 6경기를 치르면서 무실점경기 없이 대회 최다인 10골을 허용한 클린스만호는 구멍 뚫린 수비력으로 인해 자멸했다.
16강 사우디아라비아전과 8강 호주전에서 0-1로 끌려가다가 경기 종료 직전 극적인 동점골을 넣는 ‘좀비 축구’를 선보인 한국에 두 골 차이는 좁힐 수 없는 격차였다. 이번 대회 총 11골을 작성하며 필드골이 4골에 불과할 만큼 내용이 좋지 못했던 한국 공격진은 이날 유효 슈팅이 0개에 달할 정도로 무기력했다. 손흥민, 황희찬(울버햄프턴), 이강인도 답답한 전개 속에 이렇다 할 찬스를 창출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23위의 한국은 87위의 요르단에게 경기력에서 ‘완벽’하게 밀렸다. 결국 0-2로 완패한 클린스만호는 이대로 대회를 마쳤다.
주장 손흥민의 아시안컵 네 번째 도전도 허무하게 끝났다. 염원하던 아시안컵 트로피를 위해 ‘라스트 댄스’에 나선 손흥민은 패배 뒤 “내가 너무 부족했고, 팀을 이끄는 데 있어서 많은 부족함을 느꼈던 대회였다”며 “많은 선수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원하는 성적을 가져오지 못해서 너무나도 선수들한테 미안하고 또 국민분들한테 너무 송구스러운 마음뿐”이라고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