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은 순환 경제 구축과 2050년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해 2022년 에코디자인 규제안을 발표했다. 이 규제안에 포함된 디지털 제품 여권(DPP·Digital Product Passport)은 EU 내 유통되는 모든 물리적 제품에 대해 이르면 2026년부터 분야별로 디지털 제품 여권이 도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디지털 제품 여권은 제품의 생애 주기(생산, 유통, 판매, 사용, 재활용 등)에 대한 정보를 디지털로 수집·저장·공유하는 제도이다.
EU의 DPP 제도 도입과 블록체인 기술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블록체인은 데이터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기반 기술로, 네트워크 내의 참여자가 공동으로 정보 및 가치의 이동을 기록, 검증, 보관, 실행함으로써 중개자 없이도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기술이다. 따라서 디지털 제품 여권의 정보는 블록체인에 저장되면, 누구나 자유롭게 열람하고 검증할 수 있다. 블록체인은 디지털 제품 여권의 다음과 같은 기능을 강화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첫째, 블록체인은 데이터의 위변조를 막고 투명성을 보장하는 기술로, 디지털 제품 여권에 포함된 정보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둘째,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공급망 전반에 걸친 정보 공유가 가능해져, 제품의 원자재 조달부터 재활용까지의 전 과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셋째, 소비자는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제품 여권을 통해 제품의 지속가능성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으므로 합리적 소비를 할 수 있다.
한편, 우리 정부의 블록체인 기술에 대한 대응은 미국과 EU 국가에 비해 상당히 미흡한 수준이다. 선진국 정부들은 이미 블록체인 산업 분야에 주목해 관련 법안 신설 및 정책을 도입해 디지털 제품 여권과 연동시킬 계획이다. 스위스에 암호화폐나 블록체인 관련 사업이 몰리는 이유도 관련 사업에 별도의 허가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종서 EU정책연구소 원장·한국유럽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