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급발진’ 사건 이후 자동차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에 입증책임을 운전자가 아닌 제조사가 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공정거래위원회가 발주한 연구용역 보고서에 ‘피해자가 차량의 결함을 입증해야 한다’는 결론이 담긴 것으로 확인됐다.
보고서는 보완책으로 피해자가 요청할 경우 법원이 제조사에 제조물의 결함 등을 입증할 자료를 제출하라고 명령하는 ‘자료제출명령제도’ 신설과 피해자 입증책임을 일부 완화해주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자료제출을 명령할 요건을 까다롭게 만든 탓에 사실상 피해자가 제도를 이용할 수 없는 등 지금과 크게 달라지는 게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공정위가 보고서대로 개정안을 만든다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급발진 입증책임은 운전자가 지게 되고 이를 입증하기도 어려울 전망이다.
8일 세계일보 취재에 따르면 공정위 ‘제조물책임법 운용 실태조사’ 용역보고서는 제조물 결함 입증책임을 제조사로 전환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보고서는 해외 입법례를 주요한 이유로 들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EU) 등 해외 어느 곳도 제조사가 결함 여부를 입증하지 않고, 모두 피해자가 입증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현행 제조물책임법 제3조의2(결함 등의 추정)의 피해자의 입증책임 요건을 줄이는 방법을 제안했다. 제조물책임법 제3조의2는 3개 호로 구성되는데, 2호에 해당하는 ‘손해가 제조업자의 실질적인 지배영역에 속한 원인으로부터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삭제하는 방안이다. ‘해당 제조물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피해자의 손해가 발생하였다는 사실’과 ‘손해가 해당 제조물의 결함 없이는 통상적으로 발생하지 아니한다는 사실’만 증명한다면 제조물에 결함이 있다고 보겠다는 것이다.
보고서가 가장 적극적으로 제안한 방법은 자료제출명령제도 신설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자료 제출을 요구한 지 3개월 동안 제조사가 응하지 않았어야 하고 피해자가 손해나 손해배상 청구의 타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또 제조사에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제출하지 않을 수 있게 했다. 영업비밀 보호 등 자료제출명령 남용을 방지할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도 했다. 차량 제조사가 소비자의 요구를 회피할 수단을 남겨 둔 셈이다.
공정위의 ‘제조물책임법 운용 실태조사’ 연구 용역은 ‘강릉 급발진’ 사고 이후, 급발진 입증책임 전환에 관한 국민동의 청원이 6일 만에 5만명의 동의를 얻고 국회에서 관련 개정안이 발의되면서 시작됐다.
앞서 2022년 12월 강릉에서 60대 운전자 A씨가 운전하던 차량이 굉음과 함께 질주하며 차량 1대를 들이받고, 600m 이상을 더 주행해 왕복 4차로 도로를 넘어 지하 통로에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 바 있다. 해당 사고로 운전자 A씨가 크게 다쳤고, 차량에 타고 있던 A씨 손자 이도현(당시 12세)군은 사망했다.
A씨 가족은 급발진이 의심된다며 차량 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서는 한편 피해자가 급발진을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렸다. 한국에서 급발진이 인정된 판례는 4건뿐이고, 이마저도 모두 상급심에서 뒤집혔다. 급발진 문제로 차량 업체가 손해를 배상한 사례는 전무한 셈이다.
이에 공정위는 차량 급발진 사고 등 제조물 결함에 따른 손해배상 제도가 피해자 보호 취지에 맞게 잘 작동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현행법을 개정할 필요성을 살펴보기 위해 지난해 5월 용역보고서를 발주했다. 지난해 11월 연구가 종료된 이후 공정위는 최근까지 보고서를 검토해왔다.
공정위는 용역보고서는 연구결과일 뿐 어느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공정위는 이번 보고서의 방향대로 개정안에 착수할 것으로 전망된다.
공정위는 이날 발표한 ‘2024년 주요업무 추진계획’ 업무보고에서 “피해자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제조물책임법 개정안 마련을 검토하겠다”며 결함추정 요건 완화를 검토하고 자료제출명령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보고서의 결론과 일치한다.
입증책임을 제조사로 전환한 해외 입법례가 없다는 보고서 내용에 대해 전문가들은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했다”고 지적했다. 정경일 교통전문 변호사는 “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는 제조사에 손해와 관련한 자료를 폭넓게 제출하게 만든다”며 “사실상 제조사가 결함 여부를 입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알린 순간부터 제조사가 모든 자료를 폐기·훼손할 수 없게 하고 △설계도면부터 기술적 분석 보고서 등 피해 관련 모든 자료를 요청할 수 있게 하며 △영업비밀을 이유로 거부할 수 없게 했다. 또 제조사 직원들을 집중신문하고 이를 영상녹화할 수 있도록 했다. 피해자와 제조사가 동등한 정보를 갖게 된 상태에서 제조사는 결함 없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된다는 것이다.
디스커버리 제도에 비하면 보고서가 제시한 자료제출명령 제도는 ‘빛 좋은 개살구’라고 전문가들은 비판했다. 피해자가 자료제출을 요청할 수 있는 요건을 까다롭게 만들고, 비밀유지 등 제조사가 자료제출을 피할 수 있는 조항도 만들어 사실상 피해자가 제도를 이용할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이호근 대덕대 미래자동차학과 교수는 “국토교통부 제작결함심사평가위원회에 있을 때 차량 업체에 자료 제출을 요청하면 회사가 ‘중요한 기밀 사항’이라면서 블라인드 처리를 하고 껍데기만 보내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며 “자료 제출에서 회사 기밀을 제외한다면 제도가 유명무실해진다”고 말했다.
보고서 내용대로라면 법 개정이 이뤄진다고 해도 피해자 입증책임 부담은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제조물책임법 제3조의2 2호를 삭제한다고 해도 결국 차량 결함 입증책임은 피해자의 몫이라는 점에서, 지금과 큰 차이는 없다.
강릉 급발진 사고를 대리하는 하종선 변호사는 “문제는 1호와 3호에서 요구하는 내용을 입증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이라면서 “차량 소프트웨어 분석만 해도 몇십억원의 비용이 들어서 소비자가 급발진을 입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