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상점에서 파는 저금통은 그야말로 ‘돼지저금통’이었다. 뻣뻣한 고무로 된 다홍색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넣으려면 등 쪽 투입구를 칼로 잘라내야 했다. 옆구리에 복(福) 자가 양각되어 있거나 몸통이 짤따랗거나 황금색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기본형은 어쨌거나 돼지였다. 우리 집에는 그런 돼지저금통이 여러 개 있었다. 대부분은 동전 여남은 개를 짤랑대는 정도였고 오래된 전축 위에 올려놓은 저금통만 묵직했다. 아빠의 것이었다.
아빠의 저금통 근처를 나는 자주 배회했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짧고 둔탁해지면 슬그머니 저금통을 들어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동전이 절반쯤 차 있을 때가 적기였다. 초등학교 저학년인 나와 달리 언니들의 귀가 시간은 늦었고 엄마 아빠는 공사다망했다. 나는 한낮의 텅 빈 집에서 전축 아래 쪼그려 앉아 저금통을 흔들기 시작했다. 냅다 흔들다 보면 투입구로 동전 끄트머리가 비죽 튀어나왔다. 그렇게 빼낸 동전을 들고 나는 동네 슈퍼로 뛰어갔다. 달고 차가운 것, 알록달록하고 새콤달콤한 것을 사 부지런히 입에 까 넣었다. 깐돌이가 50원, 달고나가 1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나는 열심히 저금통을 흔들고 있었다.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던 마음은 진즉 사라졌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금통부터 집어 들던 때였다. 동전은 저금통 안에서 헐거운 소리를 내며 굴러다닐 뿐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나는 머리핀을 쑤셔 넣어 동전을 끌어내려다 둘 다 놓쳤다. 다급히 저금통을 흔들었지만 끄트머리가 두꺼운 머리핀은 투입구 근처로도 오지 않았다. 돼지 배를 가른 아빠가 머리핀을 발견하고 화를 내는 모습을 상상하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훌쩍거리며 동전 투입구에 눈을 대고 내 마음만큼이나 캄캄한 돼지 배 속을 들여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