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들이 미·중 갈등으로 인해 급증한 중국의 수요를 활용해 어부지리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런 상황은 미국이 글로벌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중국의 공급망 구축에 힘을 보태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14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중국은 미국 등 서방이 첨단반도체 기술 수출을 규제하기 시작한 지난 16개월간 구형 반도체 증산을 위해 레거시(범용) 장비 구매를 늘렸다. 그러면서 중국은 실리콘 세척이나 절단 등에 사용되는 일본 반도체 장비 제조 기업들의 최대 수요처가 됐다.
이 같은 수요 증가는 일본 업체들의 실적으로 직결됐고, 앞으로도 중국 의존도가 심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도쿄일렉트론의 경우 중국 매출이 급상승하면서 실적 전망치가 상향 조정됐고, 지난 13일에는 하루 시가총액이 120억달러(약 16조원)나 뛰기도 했다. 도쿄일렉트론 주가는 13일 약 4년 만에 가장 큰 폭인 12% 상승하며 최고치를 찍었다. 가와모토 히로시 도쿄일렉트로닉 부사장은 “중국의 강력한 수요가 지속되거나 더 강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일본 기업들의 중국 의존도가 너무 높아지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미국이 동맹국과 손잡고 대중 압박 수위를 높여 가는 상황에서 일본 반도체 장비 제조 기업의 불확실성도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디스코 관계자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며 불확실성을 우려했다. 그레고리 앨런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인공지능(AI) 및 첨단기술센터 소장은 “일본이 현재 중국에 판매하고 있는 반도체 장비로는 AI 반도체 등 첨단반도체 수요를 모두 충족할 수 없다”면서도 “다만 일본 반도체 업계가 핵심 부품, 장비 등을 수출할 경우 중국의 반도체 자급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블룸버그는 미국 상무부가 중국의 레거시 반도체 생산과 함께 미국 기업들의 중국 공급업체 의존도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다고 전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의 미나미카와 아키라 애널리스트는 “지금은 (일본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들의) 상황이 좋지만, 중국 수요 충족을 위해 투자를 계속한다면 미래에 사업이 갑자기 위축될 수 있는 리스크가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