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관계가 시험대에 올랐다. 1990년 외교 관계를 처음 수립했던 한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극심한 갈등 상황에 돌입한 양상이다. 최근 양국 외교 당국이 설전까지 벌이는 등 악화일로로 치닫는 모습이었지만 양측이 물밑에서는 상황을 관리하려는 움직임도 엿보인다.
외교부 관계자는 19일 “최근까지도 다양한 외교 채널을 통해 러시아와 필요한 소통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차관급 소통도 이뤄지고 있으며 한·러 갈등이 커지지 않도록 조율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윤석열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가치외교를 표방하며 대러 제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왔다. 양국 관계는 점점 멀어졌고 이달 초에는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북한에 대해 “핵 선제사용을 법제화한 비이성 집단”이라고 비판한 것을 두고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이 “편향적”이라며 이례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한국 외교부도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대사를 초치하며 항의했다. 러시아는 지난달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언론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을 두고도 강하게 비판했다.
이 같은 갈등 구도가 굳어진다면 러시아가 북한과 더욱 밀착할 수도 있다는 게 우리 정부의 고민이다. 러시아가 북한에 위성, 미사일 등의 핵심 기술을 제공하는 식의 군사 협력을 가속화할 수 있어서다. 외교가에서는 정부가 주러 대사를 지냈던 장호진 외교부 1차관을 국가안보실장으로 임명하고 신임 주러 대사에 차관급인 이도훈 대사를 보낸 사실을 감안할 때 러시아와 관계가 악화하지 않게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도 한국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려고 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이태림 국립외교원 교수는 “러시아는 상당히 긴 호흡으로 외교를 한다”며 “또한 냉전 해체 이후 중동에서 이란과 긴밀한 관계이면서도 이스라엘, 사우디와 관계를 중시한 것처럼 최대한 다양한 외교적 선택지를 가지고자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양국 갈등이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표면화하지 않는 한, 러시아는 동북아에서 한국이라는 카드를 먼저 놓지는 않을 것”이라고 봤다.
전문가들은 다음 달 치르는 러시아 대선 이후를 중요하게 보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최근 북한으로부터 초청을 받은 만큼 재집권 이후 방북이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 푸틴 대통령이 북·러 간 협력을 어디까지 약속할지에 따라 한·러 관계에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