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는 모두 중국에서 만들어지고 (미국) 미시간주의 위대한 자동차 산업은 사라질 것이다. 나는 이런 광기의 정책을 즉각 멈추겠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조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정책을 비난하며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 소셜에 지난해 11월 남긴 말이다.
최근 미국과 유럽 정치권을 중심으로 전기차 정책 ‘역주행’ 움직임이 일고 있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속도 조절론이 뜨거운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가뜩이나 수요가 주춤하고 있는 전기차 시장에 찬바람이 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확산하는 전기차 속도 조절론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동안 전기차 보급 정책을 중단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혀 왔다. 전기차 시장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중국이 시장을 장악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은 이에 맞서 내연기관차에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다.
◆전 세계 전기차 수요는 주춤
전기차 시장은 각국의 친환경차 보조금 등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최근 수년간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 왔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성장세가 둔화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각국에 등록된 전기차는 1406만1000대다. 전년 대비 33.4% 늘어난 것으로 상승세는 이어 가고 있지만 전년도 성장률(56.9%)과 2017년 이후 평균 성장률(45.9%)에 못 미치는 수치다.
전기차 수요가 주춤하고 있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고금리로 인해 소비심리가 위축된 상황에서 비싼 전기차 가격과 충전 시설 부족 등이 더해져 소비자의 구매를 망설이게 하고 있다.
각국의 보조금 정책도 축소되고 있다. 중국, 영국, 스웨덴 등이 지난해부터 전기차 보조금 지급을 폐지했고, 올해 말까지 보조금을 지급하려고 했던 독일도 예산 부족을 이유로 지난해 말 보조금 지급을 중단했다.
전기차 시장은 새로운 기술에 흥미를 갖는 ‘얼리 어답터’를 넘어 일반 소비자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는데, 이들의 구매를 이끌 만한 요소가 부족한 것이다. 첨단 기술 제품이 대중화하기 이전 일시적으로 수요가 떨어지는 시기를 의미하는 ‘캐즘’에 전기차 시장이 진입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SNE리서치는 “올해도 전기차 수요 둔화에 관련된 불확실한 요소들이 여전히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저가형 전기차가 돌파구 될까
전기차 시장이 성장 둔화기에 진입하면서 주요 완성차 기업은 전기차 생산 속도를 조절하거나 투자 계획을 최소화하고 있다.
포드는 최근 대표적인 전기 픽업트럭 ‘F-150 라이트닝’ 생산을 줄이기로 했다. 또한 이 모델 생산 공장의 교대 근무를 기존 2교대에서 1교대로 줄이고, 직원 약 1400명을 감원할 예정이다. 앞서 지난해 10월 포드는 전기차 사업 손실을 줄이기 위해 투자 계획 중 120억달러(약 16조원)를 축소하고, SK온과 합작해 건설 예정인 켄터키 2공장 가동도 연기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제너럴모터스(GM)는 올해 중반까지 전기차 40만대를 생산하겠다는 기존 계획을 폐기했다. 미시간주에 세우기로 했던 40억달러(약 5조원) 규모의 전기 픽업트럭 공장 가동 시점도 1년 연기했다.
르노그룹은 그룹 내 전동화 전략 핵심으로 내세워 왔던 전기차 부문 자회사 암페어의 기업공개(IPO) 계획을 철회했다. 폴크스바겐도 전기차 배터리 부문 자회사 파워코의 IPO 계획을 수정했다.
전기차를 내놓는 완성차 기업은 새로운 중저가 제품군을 선보이거나 기존과 비슷한 성능을 유지하며 가격을 낮추는 데 집중하고 있다.
현대차는 경차 캐스퍼의 전기차 모델인 ‘캐스퍼 일렉트릭’(가칭)을 하반기에 내놓을 예정이다.
기아는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 EV3와 세단 EV4를 올해 출시할 예정이다. 가격은 3만5000달러(약 4700만원)부터 5만달러(약 6700만원) 수준으로 책정해 가장 저렴한 EV3의 경우 보조금을 받으면 3000만원대로 구매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일찌감치 가격 경쟁을 시작한 테슬라는 2만달러(약 2700만원)대의 새로운 저가형 모델을 개발 중이다. 폴크스바겐은 2만5000유로(약 3600만원) 수준의 소형 SUV 전기차 ID.2올 콘셉트카를 공개하며 출시를 예고했다.
◆하이브리드車 질주 … ‘징검다리’ 될까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완성차 업체 현대차그룹과 도요타의 지난해 경영 성적표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이브리드차를 앞세워 역대 최대 실적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전기차 수요가 주춤하며 전동화 전환 과정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차량이 대세로 떠올랐다.
1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현대차·기아의 지난해 전 세계 하이브리드차 판매량은 83만9254대다. 이는 2022년(53만3000여대)보다 57% 이상 증가한 수치다.
현대차의 국내 하이브리드 판매 비중은 2022년 8.4%에서 지난해 18.1%로 늘었고, 미국과 유럽에서는 각각 2.2%포인트와 0.2%포인트씩 증가했다. 기아의 국내 하이브리드차 비중은 2022년 23.2%에서 지난해 25.6%로 증가했다. 미국에서는 6.7%에서 9.1%로 늘었다.
지난해 국내에서는 하이브리드차가 인기를 끌며 경유차 판매량을 뛰어넘었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에서 등록된 신차 중 하이브리드차는 30만9164대로, 전년도 판매량(21만1304대)보다 46.3% 늘었고 경유차 판매량(30만8708)도 넘었다.
일찌감치 하이브리드 시장을 개척해 온 도요타는 지난해 약 340만대의 하이브리드 차량을 판매해 2022년(260만대)보다 30.7% 늘었다. 도요타는 내년 하이브리드차 판매 대수가 500만대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하이브리드 차량이 대세로 떠오르며 현대차그룹은 하이브리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현대차는 기존 1.6터보 가솔린 엔진 기반 하이브리드 시스템에 이어 보다 강력한 2.5터보 가솔린 엔진 기반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개발 중이다. 이르면 연말에 출시되는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SUV) 팰리세이드 하이브리드 모델에 처음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내연기관차와 전기차 모델만 있었던 제네시스에 처음으로 하이브리드차를 내놓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전 세계 완성차 기업도 전기차 출시 계획을 축소하는 대신 빈자리를 하이브리드나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로 채우고 있다.
제너럴모터스(GM)는 북미 지역에서 PHEV 차종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올 초 밝혔다. 포드는 픽업트럭 F150의 하이브리드 신모델 생산을 20% 늘리고 올해 판매 목표를 4배 늘려 잡았다.
재규어랜드로버는 2026년까지 6개 랜드로버 전기차 모델을 출시할 계획을 4개로 축소하고, 대신 PHEV를 더 많이 출시하겠다는 새로운 전기차 로드맵을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