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시나 했는데…” ‘뺑뺑이’ 80대, 군병원서 겨우 수술 [의료대란 '비상']

전공의 이탈에 환자 피해 속출

전공의 비중 큰 안과 등 진료 차질
열악한 지방 병원은 공백 더 커

“환자 목숨 갖고 장난치나” 분개
“치료 계속 미뤄질까 불안” 한숨도

“이대로 뼈도 못 붙이고 돌아가시나 싶었는데 (군 병원에선) 바로 오라고 하셔서 너무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서울 ‘빅5’ 병원(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을 주축으로 대형병원 전공의들 집단행동이 본격화한 20일 응급실 ‘전화 뺑뺑이’에 받아줄 곳을 찾지 못하던 80대 환자가 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됐다.

응급실 마비에… 軍병원 이송된 민간인 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의료대란이 가시화하며 정부가 군병원 12곳의 응급실을 민간인에게 개방했다. 20일 의료진이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응급실로 민간인 환자를 옮기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이날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응급실에서 만난 보호자 임모(50)씨는 “80대인 아버지가 지난주 고관절 골절상을 당했는데 수술할 곳을 찾지 못했다”며 “오전 군 병원도 민간에 개방했다는 뉴스를 보고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임씨는 “늦어도 오늘은 수술해야 하는 상황이라 어제 저녁부터 대학병원에 전부 전화를 돌렸지만, 파업으로 응급실에 전공의가 없으니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고 외래를 잡으라고 했다”고 토로했다. 임씨는 전날 밤 서울대병원, 분당 서울대병원, 경희대병원, 한양대병원 등 대학병원과 요양병원, 2차 병원 응급실에까지 전화를 돌렸지만, 환자를 받을 수 없다는 답변에 좌절했다고 한다.

 

임씨는 “아버지는 후두암과 뇌경색 등 여러 지병을 앓고 있어 수술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무조건 수술해야 한다면서 (이곳에서) 수술할 거라고 말해주시니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했다”고 했다. 환자의 1차 진료는 지뢰 부상으로 발목 절단 위기에 놓인 병사의 발뒤꿈치 이식 수술을 집도한 사연으로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블럭’에 출연하기도 한 정형외과의 문기호 중령이 맡았다.

 

전공의들이 이탈한 전국 대형병원들은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전공의 빈자리를 전임의(펠로)와 교수들이 메워 혼란이 커지는 걸 막고 있으나 일부 진료과는 수술과 입원, 진료를 연기하는 등 시나브로 환자 피해가 늘고 있다. 일부 환자들은 “목숨을 다루는 의사들이 환자를 버리고 떠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분개했다.

 

서울 주요 대형병원에선 대체로 평소와 같은 진료가 진행되는 가운데 전공의 파업에 따른 불안감이 곳곳에서 감지됐다. 삼성서울병원 간호사 A씨는 “이날 오전 11시 기준으로 퇴원 가능한 환자들은 다 퇴원시켰다”며 “교수들이 전임의한테 지시사항을 남겨둬서 큰 혼란은 없다”고 말했다. 서울성모병원에서 만난 50대 유방암 환자도 “오전에 검진받았는데 파업으로 예약 일정이 밀리진 않았다”고 말했다. 성모병원과 함께 전공의 이탈이 많은 병원으로 꼽힌 신촌세브란스병원 응급실도 혼란 없이 정상 운영됐다.

응급실 포화 ‘빅 5’ 로 불리는 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병원의 전공의 다수가 20일 오전 6시를 기해 근무를 중단한 가운데 이날 오후 서울의 한 대형병원 응급실 앞에 병상 포화로 진료가 어렵다는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연합뉴스

응급 업무에 인력이 집중된 가운데, 전공의 업무 비중이 큰 일부 진료과에선 의료 차질이 빚어졌다. 세브란스병원 안과병원은 초진을 맡던 전공의들이 이탈하면서 관련 업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세브란스병원은 “현재 의료원 전공의 사직 관련으로 진료 지연 및 많은 혼선이 예상된다. 특수 처치 및 검사가 불가한 경우 진료가 어려울 수 있다”는 안내문을 진료실 주변에 붙였다.

 

환자들도 전공의 파업으로 수술과 외래진료 일정이 밀릴 것을 우려했다. 이날 서울아산병원을 찾은 유방암 환자는 “당장 방사선 치료 일정이 밀리진 않았지만 암은 적시에 치료받지 않으면 전이되거나 재발 우려가 있어 불안하다”고 했다.

 

60대 후반 위암 환자 B씨도 “건강검진에서 암을 진단받아 큰 병원으로 왔다”며 “전공의 파업으로 수술이 밀려 있어서 수술 날짜가 예상보다 늦게 잡혔다”고 전했다. 같이 온 30대 딸 C씨도 “환자한테는 암이 공포 그 자체인데 수술이 지연된다는 것만으로도 암세포가 커질까 봐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40대 위암 환자도 “앞으로 방사선 치료가 남았는데 계속 (파업이 이어지면) 치료가 미뤄질까 걱정된다”며 “의사들 입장도 이해되지만 (환자 입장에선) 치료가 늦어져 암이 재발할까 무섭다”고 울먹였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의 사직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20일 경남 양산시 양산부산대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뉴스1

서울보다 의사 수가 적은 지방 대학병원들은 전공의 이탈로 의료공백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경남도 도내 전공의 478명 중 390명(81.6%)이 사직서를 제출했고, 제주도 도내 전공의 141명 중 103명(모자협력 병원 파견 전공의 포함·73%)이 병원을 떠났다.

 

환자들은 정부에 병원을 떠난 의사들에 대한 강경 대응을 촉구했다. B씨는 “의료는 사람 목숨을 다루는 건데, 지금 목숨 갖고 의사들이 장난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C씨도 “정부가 이번에야말로 의대 정원 확대에 성공했으면 좋겠다”며 “예전에도 파업 분쟁 겪다 원점으로 되돌아가곤 했는데 이번엔 환자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