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테라·루나’ 폭락 사태의 핵심 인물인 권도형(32) 테라폼랩스 대표가 미국에서 죗값을 치르게 됐다. 그간 권씨는 ‘한국행’을 원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몬테네그로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미국 송환을 결정했다.
몬테네그로 일간 포베다는 21일(현지시간)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이 권씨의 미국 송환을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법원은 “권도형이 금융 운영 분야에서 저지른 범죄 혐의로 그를 기소한 미국으로 인도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매체는 법원이 권씨에 대한 한국의 범죄인 인도 요청은 기각했다고 덧붙였다.
권씨의 송환 결정이 나온 것은 그가 지난해 3월 몬테네그로에서 검거된 지 11개월 만이다. 도피 기간으로 따지면 22개월 만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권씨가 3일 이내에 항소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전했다. 권씨의 현지 법률 대리인인 고란 로디치 변호사는 인도 결정이 불법이라고 주장하며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몬테네그로 항소법원이 권씨 측의 항소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고등법원에 권씨의 송환국을 결정하라고 명령한 곳이 바로 항소법원이기 때문이다. 몬테네그로 사법부가 법률적 절차를 마무리하면 권씨는 포드고리차 국제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인도된다.
◆미국 재판부 100년 이상 징역형 내릴 가능성
권씨가 미국으로 언제 인도될지는 미지수지만, 늦어도 3월22일에는 호송관들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것으로 보인다. 몬테네그로 당국이 권씨를 붙잡아 둘 수 있는 기간이 3월22일까지이기 때문이다. 권씨의 범죄인 인도 구금은 지난 15일로 종료됐지만 그의 형기는 37일 남아 있다.
권씨가 미국에 인도된다면 중형을 선고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은 경제사범 최고 형량이 약 40년이지만, 미국은 개별 범죄마다 형을 매겨 합산하는 병과주의를 채택해 100년 이상의 징역형도 가능하다. 2022년 테라·루나 폭락 사태로 인한 전 세계 투자자의 피해규모는 50조원 이상인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검찰은 가상자산에 증권성이 있다는 판단을 적용해 소송을 이어가고 있다. SEC는 2022년 2월 권씨와 테라폼랩스가 “수백만달러의 암호화 자산 증권 사기를 조직했다”며 민사 소송을 제기했고, 뉴욕 연방 검찰은 한 달 뒤 사기·시세 조종 등 8개 혐의로 그를 기소했다.
SEC 소송 재판은 오는 3월25일 뉴욕 남부지방법원에서 시작될 예정이다. 권씨가 미국으로 인도되면 출석할 가능성이 있다. 앞서 고객 자금 수십억 달러를 빼돌린 혐의 등으로 미국 연방법원에서 기소돼 지난달 유죄평결을 받은 가상화폐 거래소 FTX의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는 올해 3월 선고공판에서 사실상 종신형인 100년형 이상을 받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CNN방송은 뱅크먼-프리드가 오는 3월 예정된 선고기일에 받을 형량이 징역 110년형에 달할 수 있다고 예상했으며, 경제매체 CNBC는 최대 115년형까지 받을 수 있다고 전했다.
과거 역사상 최대 규모인 640억달러(약 85조원)의 다단계 금융사기(폰지사기) 사건 주범인 버나드 메이도프는 2009년 연방법원에서 징역 150년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2021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한 바 있다.
◆권도형, 해외 도피에서 미국 송환 결정까지
권씨는 한때 암호화폐 업계의 ‘젊은 천재’로 불렸지만, 테라·루나 폭락 사태로 하루 아침에 범죄자이자 도피자로 전락했다. 그는 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2022년 4월 싱가포르로 출국했다. 이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와 세르비아 등을 거쳐 몬테네그로로 갔고, 지난해 3월23일 코스타리카 위조 여권으로 출국하려다 공항에서 붙잡혔다.
한국과 미국의 수사당국은 앞다퉈 몬테네그로에 범죄인 인도를 청구했다. 권씨의 신병 확보를 둘러싼 한미 양국의 쟁탈전이 본격화했지만 범죄인, 인도 절차는 지지부진하게 진행됐다. 권씨가 자신의 대한민국 여권을 사용하는 등 다른 법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단순 검거됐다면 곧바로 범죄인 송환 절차로 넘어갈 수 있었지만, 그가 몬테네그로 관할권에서 형사 사건의 당사자가 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게다가 권씨가 현지 법률대리인을 고용해 방어권 행사에 주력하면서 시간은 더욱 지체됐다.
권씨는 같은 해 5월 위조 여권 사건과 관련한 첫 재판에서 보석을 청구하며 보석금으로 40만유로(약 5억8000만원)를 제시하기도 했다. 보석이 받아들여졌다가 검찰의 항고로 다시 취소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지난해 6월19일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몬테네그로 법원이 권씨의 형사 사건에 대해 단죄를 한 뒤에야 비로소 범죄인 인도 절차가 개시됐다.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은 1심 판결을 나흘 앞둔 지난해 6월15일 범죄인 인도 절차를 이유로 권씨에게 6개월간 범죄인 인도 구금을 명령했다. 이후 법원이 2개월 추가 구금을 명령하면서 권씨는 이달 15일까지 범죄인 인도 구금으로만 8개월 동안 갇힌 몸이 됐다.
몬테네그로 법원은 지난해 11월24일 권씨의 범죄인 인도를 승인했다. 다만 법원은 권씨의 인도를 요청한 한국과 미국, 두 나라 중 어느 곳으로 권씨가 송환될지는 법무부 장관이 어느 나라에 우선권이 있는지를 검토해 최종 판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씨 측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권씨의 현지 법률대리인인 고란 로디치 변호사는 권씨가 범죄인 인도와 관련한 약식 절차에 동의한 이상 법무부 장관이 아닌 법원이 송환국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항소법원은 권씨 측의 항소를 받아들여 범죄인 인도 건을 맡은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에 송환국을 직접 결정하라고 명령했다. 로디치 변호사는 이와 관련해 1월17일 현지 일간지 포베다와 인터뷰에서 “범죄인 인도에 관한 유럽협약, 미국과 체결한 양자 협정, 국제법적 지원에 대한 국내 법률 등 모든 법적 근거에 따르면 권도형은 한국으로 송환돼야 한다고 100%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디치 변호사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포드고리차 고등법원은 권씨를 미국으로 송환하라고 판결했다. 권씨측은 항소하겠다고 밝혔지만, 늦어도 3월22일까지는 권씨가 미국으로 송환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