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기에 바꿀 수 있다.”
‘부산 돌려차기 강간살인미수 사건’의 피해자 김진주(가명)씨는 자신의 목소리로 바뀌어 가는 세상을 보며 이렇게 되뇌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27일 법을 개정해 피해자의 재판 기록 열람권을 강화하고, 국선변호사 지원을 확대했다. 이는 진주씨가 염원하던 일이다.
그는 2022년 5월22일 범죄 피해를 겪었다. 수사와 재판을 거치며 피해자를 위한 제도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실감했다. 진주씨가 ‘경찰·검찰과 법원, 법무부가 피해자를 위해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29가지 제도’를 빼곡히 나열한 목록을 만든 이유다.
진주씨는 이 목록을 법무부에 내밀었다. 법무부는 검토를 거쳐 제안사항 일부를 실제 도입했다. 피해자의 재판 기록 열람권 강화가 그중 하나다. 전자발찌를 찬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일정 거리 내로 접근하면, 피해자에게 가해자의 위치를 문자로 알려 주는 서비스도 지난 1월 시행됐다. ‘살아남은 피해자’가 세상을 바꾸는 순간이었다.
감격스러운 성과에 잠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하지만 꼭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제도는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범죄 피해자를 위한 대출 상품’이 대표적이다. 폭행을 당한 후 이틀 만에 의식을 찾은 진주씨는 입원한 동안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1년간 일을 할 수 없었다. 변호사를 선임하기 위해 24개월 할부로 신용카드를 긁었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대출도 받았다. 아버지가 “적금을 깨야 할 것 같다”고 말했을 땐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내가 무슨 죄를 지었나’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사건 발생 후 1년 반 이상 흐른 지금, 다시 회복해 일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제도가 도입되기를 희망한다. 피해자마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시간은 다르고, 회복 기간이 길어지는 동안 버팀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주씨는 “범죄 피해자들 중에는 처음 피해를 겪은 사람이 대부분”이라며 “범죄를 이미 한 번 겪었다고 해서 ‘능숙한 피해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실제 범죄 피해자 중 자신이 피해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이 있을까.
범죄 피해자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 힘든 순간은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일면식 없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묻지마 범죄’가 빈번하다. ‘신림동 흉기 난동 사건’으로 사망한 또래 피해자도, ‘분당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 당시 가해자의 차량에 치여 사망한 60대 여성도 평범한 일상을 누리다 범죄 피해를 봤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우리 이웃이 어느 날 갑자기 범죄 피해자가 된다. 그게 나라면 어떨까.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를 위한 세상이 절실할 터다.
진주씨는 아직도 피해자들이 ‘당연한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가 만들고자 하는 ‘피해자를 위한 세상’은 이미 범죄 피해를 본 피해자만이 아니라, 앞으로 범죄 피해를 볼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세상이다. 단순한 제3자가 아닌, ‘잠재적 피해자’ 중 한 명으로서 그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