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생으로 송림고 졸업 후 곧바로 V리그에 뛰어든 정지석은 2013~2014 신인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6순위로 대한항공의 유니폼을 입었다. 그때만 해도 고교 졸업 후 프로에 직행하는 일이 많지 않았기에 정지석의 지명은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대한항공의 정지석 지명이 V리그 역사를 바꿀 것이라고.
한국 나이로 10대에 V리그를 코트를 밟은 정지석. 어느덧 세월은 십여 년이 흘렀다. 얼굴에는 소년미가 여전하지만, 이제 정지석도 프로 11년차의 베테랑이 됐다. 한국 나이로 서른. 나이 앞자리가 벌써 두 번이나 바뀌었다.
그 사이 정지석은 현역 최고의 아웃사이드 히터로 성장했다. 1m95의 신장은 아웃사이드 히터치고는 장신에 속한다. 여기에 점프력과 파워, 테크닉까지 골고루 갖춘 공격과 리시브와 디그까지 수비도 능통하다. 최고 수준의 서브와 가공할 만한 사이드 블로킹까지, 한 마디로 못 하는 게 없는 올라운드 플레이어다. 정규리그 MVP 2회(2018~2019, 2020~2021), 챔프전 MVP 1회(2020~2021), 베스트7 4회 선정까지, 수상 경력만 봐도 최고의 선수임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2023~2024시즌엔 정지석이란 이름값에 못 미쳤던 게 사실이다. 국가대표 차출 동안 당한 허리부상으로 시즌 개막전부터 개점휴업에 들어갔다. 2라운드까지 통으로 쉰 정지석은 3라운드에서야 처음 선을 보였지만, 그의 경기력은 한창 좋을 때에 비해 한참 떨어져있었다. 타점과 파워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그의 전매특허인 파이프(중앙 후위공격)를 보기는 쉽지 않았고, 서브 감각도 많이 떨어져있었다. 허리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몸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7일 한국전력전 이전까지 19경기를 뛰면서 올린 정지석의 시즌 성적표는 데뷔 이래 최악이었다. 공격 성공률 42.73%, 공격 효율 22.73%. 통산 평균인 53.36%, 34.44%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서브도 지난 시즌 세트당 0.420개에 비해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0.149개, 블로킹도 지난 시즌의 세트당 0.634개로 절반 수준인 0.343개에 불과했다.
대한항공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은 서두르지 않았다. 정지석에게 몸상태를 끌어올릴 충분한 시간을 부여했다. 그 사이 정지석의 경기력은 서서히 올라왔다. 27일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열린 2023~2024 V리그 남자부 6라운드 한국전력전을 앞두고 대한항공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은 “(정)지석의 몸이 좋았을 때와 비교해 지금이 어느 정도라고 수치화해서 말하긴 어렵지만, 그전보다는 확실히 올라왔다. 몸 만들 시간을 급하지 않게 충분히 줬고, 플레잉 타임도 조금씩 늘려갔다”라면서 “최근엔 (정)지석에게 서브나 공격에서 더 끌어올려야할 때라고 얘기했다. 확실히 올 시즌 처음 코트에 나섰을 때보단 많이 좋아졌다”고 평가했다.
틸리카이넨 감독 말대로 한창 좋았을 적의 상태로 수렴해가고 있는 정지석은 이날 자신이 왜 현역 최고의 아웃사이드 히터로 꼽히는지를 여실히 증명했다.
네트를 살짝 스치고 지나가며 날카롭게 들어가는 서브는 한국전력 리시브를 초토화시켰다. 서브 에이스는 4개였지만, 리시브가 크게 흔들려 한국전력이 제대로 된 공격을 만들지도 못하고 그대로 넘긴 공도 많았다. 이는 한선수와 유광우, 현역 최고의 세터들의 요리로 대한항공의 손쉬운 득점으로 이어졌다.
공격에서도 정지석은 전매특허인 파이프를 마음껏 구사하고, 뒤에서 어렵게 이단연결되어 올라온 공을 오픈 강타로 처리하는 등 전성기에 버금가는 기량을 선보였다. 이날 정지석의 성적표는 서브득점 4개 포함 17점. 1세트엔 75%에 달했던 공격성공률이 경기를 마쳤을 땐 56.62%까지 떨어졌지만 충분히 팀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성공률이었다.
정지석의 활약을 앞세워 대한항공은 한국전력을 3-0 셧아웃시켰다. 승점 3을 추가한 대한항공은 승점 64(21승11패)로 2위 우리카드(승점 59, 20승10패)와의 격차를 더 벌렸다. 반면 한국전력(16승16패)은 승점 47에 그대로 머물며 3위 OK금융그룹(승점 50, 17승14패)과의 격차를 줄이는 데도 실패했고, 5위 삼성화재(승점 44), 6위 현대캐피탈(승더 44)의 추격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경기 뒤 수훈선수로 인터뷰실에 들어선 정지석은 “그간 연습 때는 잘 되다가도 막상 경기에서는 내 기량을 보여주지 못한 게 많았다. 오늘은 블로킹 빼고는 전 부분에서 연습한 만큼 나온 것 같아 뿌듯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한창 좋았을 때를 100이라고 하면 현재는 어느 정도 되느냐’는 질문에 “80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경기 중 허리가 불편한지 스트레칭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정지석은 “그동안 괜찮다가 오늘 웜업을 하다가 등 부분이 살짝 땡겨서 쎄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장광균 코치님이 ‘감기 기운 있는 선수들이 오히려 힘을 빼고 플레이해서 더 잘하기도 해’라고 말씀하셨는데, 별로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경기가 잘 풀린 거 보니 이젠 좀 아파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정지석 역시 올 시즌 전 부분에 걸쳐 기록이 다 떨어져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워낙 평소에 데이터를 보는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 정지석은 “아마 프로 데뷔 이처럼 저점으로 떨어진 적이 없을 것 같다. 올 시즌엔 허리 부상을 당했으니 그런가보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대로 갇혀버릴까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다시금 몸상태와 경기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많은 조언과 피드백을 해주신 토미 틸리카이넨 감독과 코치님들께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정지석과 링컨의 부상 이탈로 시즌 초반 헤매던 대한항공은 어느덧 7연승을 달리며 선두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다보니 주축 선수들이 빠져도 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그야말로 되는 집의 전형이다. 정지석은 “밖에서보면 우리 팀이 좋은 뎁스를 가지고 있어서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선수들 사이의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누군가를 제쳐야만 시합을 뛸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그 경쟁을 너무 티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저희끼리는 건강한 경쟁을 치르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정지석의 부재를 메운 것은 3년차 아웃사이드 히터 정한용이었다. 정지석은 “(정)한용이가 아직은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요소요소에 조언을 해주곤 한다. 한용이에겐 기술적으로 조언해줄 것은 없다. 워낙 기술적으로 뛰어난 후배다. ‘상대 목적타 서브가 어디로 올 것 같다’ 등의 조언을 해주고 있다”고 답했다.
서른이 된 올해 정지석에겐 소중한 존재가 생겼다. 지난 1월 태어난 딸 아린이다. V리그 데뷔 때만 해도 소년이었던 정지석이 이제는 한 아이의 아빠가 됐다. 정지석은 “올 시즌 부진이 길었는데, 경기를 마치고 기록이나 이런 것을 보며 상처를 받고 집에 가서 딸을 보면 그 상처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이제는 딸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 험한 세상으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면서도 “제가 아직 이러고 있네요. 더 열심히 해서 ‘역시 정지석이다’라는 말을 듣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대한항공과 우리카드는 다음달 6일 6라운드 맞대결을 벌인다. 사실상 올 시즌 정규리그 우승팀을 결정하는 중요한 경기가 될 전망이다. 정지석은 “저희가 다음달 6일 우리카드에게 지고, 다른팀이 우리카드를 이겨줘서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해도 우리카드에게 상대 전적이 2승4패로 밀리게 되는 것 아닌가. 그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라면서 “이제 가장 중요한 시기다. 제가 진작에 잘했으면 이런 순위 경쟁 상황이 오지도 않았을 거고, 외국인 선수를 고르는 과정도 좀 더 시원스럽게 거쳤을 것 같다. 제가 자초한 상황이니 앞으로 더 잘 해내겠다”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