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임신을 안 뒤 ‘아들일까 딸일까’란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 누구보다 앞장서 법을 지켜야 할 변호사로서 차마 의사에게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2004년 정모 변호사가 헌법재판소에 낸 헌법소원 청구서 일부다. 그는 출산 전 의사가 부모에게 태아 성별을 알려주는 행위를 금지한 의료법 조항이 부모의 알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침해해 위헌이라며 헌소를 제기했다. 2008년 헌재는 해당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남아 선호 사상이 강했다. 여기에 1960년대부터 정부가 산아 제한 정책을 밀어붙이며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아들, 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가 무색하게 딸을 임신하면 낙태조차 서슴지 않는 폐단이 생겨난 것이다. 그 결과는 극단적 성비 불균형이었다. 1985년 출생 성비가 여아 100명당 남아 110명에 달한 데 이어 1990년에는 여아 100명당 남아 115명까지 치솟았다.
정부는 1987년 의료법에 태아 성 감별 금지 및 처벌 조항을 신설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움츠러들었다. 2008년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 후 조금 달라지긴 했다. ‘임신 32주 이전에 태아 성별을 고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라는 취지로 의료법을 고쳤기 때문이다. 출산이 임박하면 딸인지, 아들인지 알려줘도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임신하자마자 태아 성별이 제일 궁금한 예비 부모들 눈높이에 한참 모자랐다.
그제 헌재는 개정된 의료법 조항마저 위헌으로 판단했다. 부모는 임신 기간과 상관없이 언제든 태아 성별을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다. 남아 선호 사상이 확연히 쇠퇴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런데 재판관 9명 중 3명은 우려를 표했다. 이들은 소수의견에서 “위헌 결정은 태아의 생명 보호를 위한 수단을 대안 없이 일거에 폐지하는 결과”라고 지적했다. 2019년 헌재가 형법상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국회는 아직 보완 입법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낙태죄는 효력을 잃고 4년째 공백이 이어지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태아 성 감별 금지 조항마저 사라지면 성별을 이유로 한 낙태를 막을 방도가 없다. 정부는 낙태로부터 태아 생명을 보호할 책임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