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상장기업들이 3월 마지막 주에 정기 주주총회를 집중 개최하는 ‘떼주총’ 현상이 재연되고 있다. 전년도 결산 회계처리가 늦어진 결과라는 게 이들 기업의 설명이다. 일각에선 주총을 통해 소액주주 등과 소통하는 데 소극적인 국내 기업의 관행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정부가 임기 내 주요 과제로 주주가치 강화를 통해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국내 주식시장 저평가 현상)를 타파하겠다고 선언한 만큼 떼주총 현상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전자주총제 도입과 같은 시스템적 개선과 함께 기업 관행을 바꾸기 위한 당근책을 병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18일 한국예탁결제원과 국회도서관이 발간한 ‘데이터로 보는 전자주총’ 보고서에 따르면 12월 결산 상장법인 중 3월 하순(21∼31일) 정기 주총을 개최한 비율은 지난해 94.2%에 달했다. 최근 5년간으로 확대해도 2019년 90.4%, 2020년 82.6%, 2021년 91.8%, 2022년 92.3%로 떼주총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요일로 따져보면 금요일에 주총을 연 기업이 많다. 보고서는 2019∼2023년 12월 결산 상장사들의 주총 개최 요일을 분석한 결과 31.9%가 금요일에 열렸다고 밝혔다. 이어 수요일 19.2%, 화요일 17.8%, 목요일 17.4%, 월요일은 13% 수준이었다.
올해도 ‘3월 하순, 금요일’에 주총이 집중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금요일인 오는 22일에 142개(코스피 84개, 코스닥 58개), 역시 금요일인 29일엔 425개(코스피 119개, 코스닥 284개, 코넥스 22개) 기업이 주총을 연다. 특히 28일에는 무려 700개(코스피 193개, 코스닥 464개, 코넥스 43개) 기업이 개최한다. 이런 일정 탓에 당장 소액주주들은 주식을 보유한 모든 기업의 주총에서 의결권을 행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예년과 달리 주총 장소가 갑자기 바뀌어 주주의 의결권 행사에 차질이 빚어지기도 한다. 모녀와 장·차남 간 경영권을 둘러싼 대립이 격화하고 있는 한미약품그룹의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는 오는 28일 경기 화성시 정남면에 있는 라비돌 호텔에서 주총을 연다. 그룹 측은 상장 후 2003년부터 서울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한미타워에서 주총을 열어 왔다. 상법상 본점 소재지 근처에서 개최하게 돼 있다는 이유를 들어 그 근처인 화성시 팔탄면 인근으로 결정했다는 게 그룹 측 설명이다. 어머니 등을 상대로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임종윤·종훈 한미약품 사장 측은 상장 후 최초로 서울에서 2시간 이상 소요되는 법인 소재지 근처 외부 시설에서 개최하는 저의가 궁금하다고 반발하고 있다. 이에 한미약품그룹은 설명자료를 내고 “그동안 특별한 경영상황 관련한 이슈가 없었으므로 주주들에 편의를 드리고자 본점 소재지가 아닌 서울 송파구 본사에서 주주총회를 진행해 왔다”며 “하지만 이번 주총은 표 대결이 예정돼 있으므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반박했다.
도대체 대다수 상장기업은 왜 3월 하순에 집중적으로 주총을 개최할까. 한 재계 관계자는 “12월에 회계연도가 마감되면 외부 회계법인의 결산자료를 통해 감사를 받아야 하는데, 외부감사법 개정안 등으로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결산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주총일이 늦어지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주가 주총에 직접 출석하지 않고 사전에 전자방식으로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전자투표제도를 도입한 기업이 10곳 중 1곳꼴에 그친 현실로 미뤄 보면 주주 상대 소통에 소극적인 기업의 태도에도 분명히 문제가 있다. 2019∼2023년 전자투표 행사율(전자투표 행사 주식 총수를 의결권 있는 주식 총수로 나눈 뒤 100을 곱한 값) 추이를 보면 2019년 5.38%, 2020년 5.07%, 2021년 5.13%였다가 2022년엔 10.09%로 올랐는데 지난해는 11.62%로 사실상 ‘제자리걸음’이었다. 소액주주들의 주주권 행사에 탐탁지 않아 하는 기업들의 속내가 드러난 셈이다.
한국거래소와 한국상장사협의회 등은 떼주총 문화를 바꾸기 위해 해마다 집중일을 피해 개최하는 기업들에 공시 우수법인 선정 시 가점을 내거나 불성실 공시 시 벌점을 1점 감점하는 등의 당근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기업들의 소극적 의지를 바꾸긴 어려운 게 현실이다. 상법을 개정해 전자주총을 의무화하는 등 제도적 개선은 물론이고 기업들의 의식 자체를 바꾸는 문화적 풍토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