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권위 있으니까 권위 있다!”
최근 서울아산병원을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전국 대학병원 교수진에게 “정부를 믿고 대화에 나와 달라”고 당부했다는 기사를 보고 문학평론가 고 김현이 ‘행복한 책읽기’에 적은 이 문장이 생각났다. 김현은 “권위주의의 특성은,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믿음’에서 연유하는 오만과 뻔뻔함에 있다”며 “권위주의는 동어반복”이라고 단언했다.
기실 수련병원 전공의를 필두로 의대생, 전임의(펠로)에 이어 의대·대학병원 교수들마저 집단사직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정원 2000명 확대 때문이다. 교수들이 정부와의 대화 전제조건으로 ‘2000명 증원’ 백지화를 내걸고 있는데, 대통령은 필수·지역의료 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의 의지와 진정성을 믿고 대화 테이블로 나오라는 게 좀 이상했다. 갈수록 첨예화하는 의·정 갈등의 중재자를 자처한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도 전국의대교수협의회 지도부와 면담을 위해 “나를 믿어 달라”고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예상대로 의료계 반응은 냉담하다. 정부가 대화를 개시한 26일에도 교수들의 사직 러시는 그칠 줄 모른다. 이유는 자명하다.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총선을 목전에 둔 정부가 집권여당의 득표를 위해 과학적 추계나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2000명 증원안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심장내과 전문의로 봉직해 오다 최근 사직서를 제출한 배장환 충북대 의대 교수는 세계일보와 통화에서 “정부가 대화가 아닌 ‘명령’과 ‘제한’으로 의대 증원을 강행하는 현실을 보며 의료계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게 됐다”고 날을 세웠다.
물론 의대 증원은 반드시 필요하다. 의대 정원이 19년째 3058명으로 묶인 사이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오픈런’, ‘수도권 원정 진료·출산’ 등 필수·지역의료는 ‘공백’이라는 표현까지 나올 정도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 의대 증원의 높은 지지율이 이를 방증한다. 이번 증원분 2000명의 배분도 지역별 의료 격차를 줄이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재확인해 준다. 비수도권 의대에 82%(1639명)를, 경기·인천에 18%(361명)를 증원하고 서울권엔 1명도 증원하지 않았다.
현재 최소 40%(제주·강원 제외)인 지역인재전형 선발 비중을 60% 이상으로 높이겠다는 정부 방침도 고사 직전의 지역의료계 살리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단순히 의사가 많아지면 지역에 정착하는 의사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낙수효과’만이 아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김계현 연구위원이 학술지 ‘의료정책포럼’에 게재한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의대 졸업지역이 지방일 경우 수도권인 경우보다 지방에 근무할 가능성이 비수도권 광역시의 경우 2.33배, 도지역의 경우 2.43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공의가 지역에서 수련했을 경우 지역 정착 효과는 더 뛰어나다. 광역시의 경우 수도권에서 수련했을 때보다 12.41배, 도지역은 5.94배 높았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한다. 의대 증원 명분이나 이유가 아무리 차고 넘쳐도, 증원에 대한 국민 여론이 아무리 강력해도 정부 단독으로 증원을 밀어붙일 수는 없다. 의료계의 주장이 먼 미래 ‘파이’가 줄 것을 우려하는 생떼도 아니다. 정부가 2000명 증원의 근거로 내세운 서울대와 한국개발연구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고서 필진은 점진적 확대가 핵심 내용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전공의들의 ‘열정페이’ 현실은 그대로다. 일부 전공의는 이참에 병원으로 다시 돌아가느니 개원해 돈을 버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의료계 한 지인은 “필수의료, 특히 외과를 지원한 분들은 정말 환자 생명을 살리겠다는 사명감으로 10여년의 힘든 수련과정을 견딘 분들”이라고 했다. 정부가 새로운 의·정 대화에서 “믿어 달라”는 호소 외에 대학병원 교수들이 개진하는 갈등 중재나 필수·지역의료 살리기 방안을 적극 반영한다면 지금의 ‘치킨게임’과 같은 파국은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결국 필수·지역의료를 지키는 주체는 이들 대학병원 의사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