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에는 업무에 대한 불안감이 컸는데, 지금은 상황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죠.”
전공의 집단 이탈로 발생한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간호사가 의사 업무 일부를 대신 할 수 있게 한 시범사업이 27일 시행 한달을 맞았다. 간호사들은 “법적 보호 아래서 일할 수 있게 됐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의·정 갈등이 지속하는 데 대한 피로감을 호소했다. 특히 전공의에 이어 교수들까지 사직서를 제출하는 최근 상황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있다고 한다.
대학병원 중환자실 간호사 이모(42)씨는 시범사업 이후 “당당하게 일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의사 지시에 따라 약을 처방하고 환자에게 동의서를 받는 일은 사실 이전에도 ‘알게 모르게’ 하던 일인데, 이제는 “환자들 앞에서 더 자신 있게 일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정부는 지난달 27일 ‘간호사 업무 관련 시범사업’을 시작하고 이달 8일과 18일 두차례에 걸쳐 간호사 업무 범위를 명시한 지침을 배포했다. 이에 따라 현행법상 ‘진료보조’라는 표현으로 모호하게 규정돼 있던 간호사 업무 범위가 명확해졌고, 보건의료기본법에 근거를 둔 사업이기 때문에 간호사들은 업무에 대한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있게 됐다.
◆병원 수익악화에 “실직 걱정”
하지만 최근 간호사들을 힘들게 하는 건 따로 있다. 이씨는 “간호사들은 ‘직장이 없어질 수 있다’는 걱정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경영 악화가 심화하다 보니 당장의 급여나 병원이 문을 닫을 수 있다는 걱정을 하게 된다”며 “국민의 생명권도 물론 중요한데, 병원은 제가 근무하고 있는 직장이기도 하다”고 부연했다.
전공의 집단 이탈 이후 병원들은 입원 환자를 받지 않거나 수술 등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했는데, 이에 따라 병원 수익이 악화했고 간호사들은 무급 휴가를 사용하고 있다. 무급 휴가를 신청한 간호사들은 일 급여가 15∼20만원 정도 차감돼, 5일이면 월급에서 100만원이 줄어든다고 한다.
이씨는 “이제 교수들까지 단체로 사직서를 내겠다고 협박하고 정부는 계속 강경하게 대응하겠다고 하는데, 간호사들은 그 중간에서 무기력하게 있어야 하는 상황이 너무 답답하면서 화가 난다”며 “의대 증원 문제는 정부와 의사단체가 논의해야 할 사안인데, 그것 때문에 간호사들이 피해 보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냐”고 토로했다.
◆정부 “PA간호사 제도화하겠다”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들이 집단사직에 나서자 정부는 진료지원(PA)간호사 제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의료 공백 사태 장기화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이날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 브리핑에서 “PA간호사가 ‘보건의료기본법’에 따른 법적 보호를 받으며 원활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며 “내실 있는 시범사업 운영을 바탕으로 PA간호사 제도화에 필요한 조치도 추진해 가겠다”고 말했다.
PA간호사는 그동안 수술장 보조·검사 시술 보조·검체 의뢰·응급상황 시 보조 등 역할을 하며 의사 업무를 수행했는데, 이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어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정부는 PA간호사의 합법화 방안을 고심하던 중 전공의 집단 이탈 등으로 의료 인력 공백이 길어질 조짐이 보이자 합법화를 본격화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복지부는 전공의가 빠진 47개 상급종합병원과 87개 비상진료 공공의료기관을 조사한 결과 상급종합병원 소속 4065명을 포함해 약 5000명의 PA간호사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들 병원은 향후 1900명의 PA간호사를 추가로 증원할 예정이다. 이달 말 332개 종합병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까지 완료하면 그 규모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간호사들은 PA간호사 제도화 움직임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대한간호협회(간협) 관계자는 “그간 PA간호사들은 유령처럼 존재하며 의사 업무의 일부를 대신해왔다”며 “이 기회에 반드시 법 제도를 만들어 간호사의 업무를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