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
2016~2017시즌 이후 7년을 기다리고 기다려 맞이한 봄 배구였다. 올스타 브레이크를 마친 뒤 후반기 5,6라운드에는 누가 뭐래도 V리그 여자부의 지배자였기에 ‘모란’을 피울 수 있을 줄만 알았다. 그러나 주축 선수 두 명의 부상 공백은 컸다. 결국 ‘대전의 봄’은 단 1경기로 막을 내렸다. 그들의 이번 봄은 그렇게 ‘찬란한 슬픔의 봄’이 되어버렸다. 여자 프로배구 정관장 얘기다.
고희진 감독이 이끄는 정관장은 26일 인천 삼산월드체육관에서 열린 2023~2024 V리그 여자부 플레이오프(3전2승제) 3차전에서 흥국생명에게 0-3(18-25 19-25 19-25)으로 완패했다. 2016~2017시즌 3위에 오르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이후 7시즌 만에 맞이한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1승2패로 퇴장하게 됐다.
◆ 사령탑은 아니라지만, 이소영, 정호영의 공백은 컸다
플레이오프 3차전을 패한 뒤 고희진 감독은 “부상 선수 핑계를 대긴 싫다. 아쉽긴 하지만, 누가 없어서 졌다는 등의 그런 말은 안 나왔으면 한다. 이유나 핑계는 없다. 오늘은 흥국생명이 저희를 압도한 경기였고,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패장이 남길 수 있는 가장 깔끔하고도 완벽한 답변이었다.
그럼에도 이소영, 정호영의 공백은 못내 아쉬웠다. 1차전에서 이소영의 공백을 대신한 박혜민이 부진했고, 정호영이 왼쪽 무릎 통증을 느끼자 고 감독은 2차전에서 이소영의 자리엔 김세인을, 정호영을 대신할 미들 블로커 한 자리엔 베테랑 한송이를 투입했다.
김세인이 2차전에서 올린 공격 성적은 평범했다. 서브득점 1개 포함 9득점. 성공률은 33.33%. 다만 1차전에서 박혜민이 전위에 올라올 때마다 공격 생산력이 뚝 떨어진 것을 감안하면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였다. 흥국생명 미들 블로커들이 적어도 김세인이 전위에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게 중요했다. 김세인에 대한 견제가 가해지자 지아와 메가가 공격할 수 있는 틈이 더 생겼고, 두 선수는 2차전에서 나란히 동반 폭발했다.
한송이 역시 2차전 성적은 블로킹 1개 포함 3점에 그쳤다. 한송이 스스로 “제 플레이는 빵점이에요. 빵점”이라고 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기여가 컸다. 유효 블로킹 11개를 기록하며 상대 공격의 예봉을 꺾었고, 세터 염혜선이 토스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선 침착하게 연결작업을 해줬다. 고 감독도 2차전 한송이의 활약에 대해 “송이가 들어오면 안정감이 생긴다. 감독은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잘 해주는 선수들이 더욱 고맙다”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3차전에서 고 감독은 2차전과 동일한 스타팅 라인업을 가져갔다. 정호영이 3차전을 앞두고 간절하게 출전하겠다고 졸랐지만, 고 감독은 눈 앞의 1승보다 앞으로 10년은 더 정관장의 코트 가운데를 든든하게 지켜줄 미들 블로커의 장래를 더 생각했다.
2차전의 ‘깜짝스타’였던 김세인의 활약은 3차전에서 이어지지 못했다. 1,2세트에 선발 출장했으나 단 2득점에 그쳤다. 공격 성공률은 20%에 그쳤고, 공격 효율은 –10%였다. 2차전에서 64.71%(11/17)에 달했던 리시브 효율도 12.5%(1/8)로 다섯 토막이 났다. 한송이 역시 블로킹 2개와 유효 블로킹 6개를 잡아내긴 했지만, 흔들리는 팀을 잡아낼 힘은 이제 그에겐 없었다.
◆ 흥국생명의 ‘지아 흔들기’가 대성공했다
2차전 패배 속에서 흥국생명은 3차전 승리를 위한 돌파구를 찾았다. 정관장 공격의 정수인 지아의 파이프(중앙 후위 공격)를 봉쇄해야만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남자부 선수들의 파이프를 연상케 하는 지아의 파이프는 정관장 팀 전체의 사기를 고조시키는, 1점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 마치 농구의 강력한 슬램덩크처럼.
2차전에서도 지아에게 가장 많은 서브를 때렸던 흥국생명이지만, 3차전에선 그 비중을 더욱 늘렸다. 전체 서브 67개 중 32개를 지아에게 때렸다. 47.7%로 거의 절반 가까이를 지아에게 때린 셈이다. 2차전에서도 전체 서브 75개 중 32개를 받아냈던 지아는 2차전의 리시브 효율은 37.5%로 준수했다. 지아가 리시브에서 버텨준 덕에 정관장의 팀 리시브 효율은 45.33%로 매우 안정적이었다. 그 덕에 염혜선은 지아와 메가에게 안정적이면서도 다양한 공격루트를 활용하는 토스를 올려줄 수 있었다. 2차전 지아와 메가의 공격 성공률은 각각 47.76%, 48%로 거의 50%에 육박했다.
반면 지아가 3차전에서 받아낸 리시브 32개 중 세터 머리 위로 정확하게 연결한 리시브는 단 6개에 불과했고, 2개는 서브에이스로 연결됐다. 리시브 효율이 12.5%로 급락했다. 김세인의 리시브 효율도 12.5%에 불과했고, 주전 리베로 노란의 리시브 효율은 아예 0이었다. 9개의 리시브 중 단 2개만 정확하게 세터에게 연결됐고, 서브에이스 2개를 허용했다. 팀 리시브 효율이 11.94%에 불과했다.
리시브 효율이 급락하자 정관장으로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메가와 지아에게 의존하는 단순한 공격밖에 할 게 없었다. 속공은 단 5개에 그쳤다. 흥국생명 블로커들은 코트 가운데 공격은 신경쓰지 않아도 됐다. 속공을 쓸 수 없게 되자 지아의 파이프도 크게 활용도가 떨어졌다. 파이프는 상대 블로커가 속공일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가야만 블로킹 타이밍을 흔들 수 있다. 2세트 21-16에서 흥국생명 미들 블로커 김수지가 지아의 파이프를 혼자 떠서 막아낸 것도 속공을 전혀 쓸 수 없었기에 가능했던 장면이었다.
경기 뒤 흥국생명 아본단자 감독은 지아에 대한 목적타 서브 비중을 더욱 늘린 부분에 대해 “나도, 선수들도 지아에게 압박감을 더 크게 심어주고 싶어해서였다. 목적타 비중을 더욱 늘렸고, 최대한 불편하게 만들어 파이프를 때릴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게 주 목적이었고,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 2024년의 봄은 짧았지만, 2025년의 봄은 길어질 수 있다
7년을 기다린 정관장의 2024년 봄은 짧았지만, 희망의 씨앗을 뿌린 시즌으로 기억될 법 하다. 2년 전 여자배구판으로 넘어올 때 정관장 팬들의 큰 반대에 부딪혔던 고희진 감독은 올 시즌 자신이 여자배구 사령탑으로서도 충분히 능력이 있음을 입증했다. 여기에 이숙자, 이강주, 김정환 등 현역 시절 각기 다른 포지션에서 뛰었던 코치들이 조화로운 협업을 통해 각 포지션 선수들을 레벨업시켰다. 5,6라운드에서 완전체 정관장이 보여준 막강함은 챔프전 우승을 예감케 할 정도였다.
물론 과제는 있다. 완전체 정관장 선수들 중 다수가 FA 자격을 얻는다. 수술 후 돌아와 완벽한 몸 상태에 이르자 정관장 전력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시켜줬던 공수겸장 아웃사이드 히터 이소영을 비롯해 미들 블로커의 한 축인 박은진, 리베로 노란이 FA 자격을 얻는다. 여기에 정관장 공격을 이끈 ‘외국인 듀오’ 지아, 메가와 재계약 여부를 고민해야 한다. 이들을 다 눌러앉혀 다시 한 번 챔프전 우승에 도전할 수 있을까.
정관장의 ‘모란’은 아직 피지 않았다. ‘전력 100%로 봄 배구를 맞이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인해 올 봄은 정관장에게 ‘찬란한 슬픔의 봄’으로 기억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