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무수한 별 중에서 왜 일등별만 기억해야 하나요. 이등별, 삼등별에 대한 자료도 남겨야 우리 미술계가 풍부해집니다.”
보라색 정장 차림에 꽃무늬 또는 빨간 넥타이를 매고 각종 미술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노신사. ‘호모 아키비스트’ ‘움직이는 미술자료실’ ‘미술계 114’ ‘미술계 넝마주이 전설’ ‘미답의 길을 걸은 아키비스트’…. 수많은 별칭이 따라다니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 월간 ‘서울아트가이드’ 편집인, 김달진미술연구소장 등의 직함을 가진 김달진(69) 관장의 말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모으는 게 마냥 좋았다. 껌 상표에서 담뱃갑, 우표…. 외국 대통령이 방한할 때는 기념우표를 확보하기 위해 우체국으로 달려갔다. ‘여원’ ‘주부생활’ 등에 실린 서양 명화는 보이는 대로 수집했다. 깔끔하게 오려 흰 도화지에 붙이고 아껴 가며 감상했다. 공부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뿌듯하고 기쁨이 컸다. ‘수집’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찍 엄마를 잃은 상실감을 덜어 주었다.
그에게 홍익대 박물관장이던 이경성 교수는 평생 은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한 이 교수는 김달진을 임시직으로 채용했다. 이 교수는 “미술관에 와 보니 자료의 수집이나 도서실 운영이 엉망이어서 … 자료 수집을 담당하는 직원으로 채용했다. … 꼬박꼬박 정리하는 그의 능력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김달진은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5년간 일하게 된다. 그는 입사 8년이 지난 1989년에 서울산업대 금속공예과에 입학한다. 1999년에는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화예술학 석사를 마쳤다.
그토록 바라던 일을 하던 그는 자료의 축적과 전산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사동에 미술정보센터 설립을 제안하기도 했다. 2005년 5월24일자 세계일보를 통해 그는 “모든 일은 정보와 자료에서 출발한다. 미술의 메카인 인사동에 미술정보센터 설립을 제안한다. 미술인과 관련자, 애호가, 외국인들이 찾아오기 쉬워 접근성이 좋다. … 앞으로 열릴 각종 비엔날레, 아트페어도 이곳을 홍보 창구로 … 정부 예산을 … 가장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 인프라 구축에도 나눠 써야 할 때”라고 밝혔다.
김달진은 결국 국가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보다 몇 년 빠른 2008년에 미술자료정보센터 역할을 하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개관했다. 앞서 2001년 12월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출범시켰는데, 이는 월간 ‘서울아트가이드’, 미술정보포털 ‘달진닷컴’,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한국미술정보센터’의 모태가 됐다.
‘서울아트가이드’는 가장 대표적인 정보지다. 예술의전당, 제주도립미술관 등 전국 550여곳에서 무료로 배포한다. 대부분의 갤러리가 입구에 비치하고 있다.
“전국 전시 공간의 구역별 지도와 전시 일정, 연락처, 전문가 칼럼, 작가 추천, 미술계 현안에 대한 제언 등을 싣고 있습니다.”
오래전 잊힌 작가의 부고도 챙겨 기록한다. 그에게 작가는 유·무명을 떠나 누구든 소중하기 때문이다.
2014년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자리 잡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다. 지하층은 수장고, 1층은 전시장, 2층은 미술정보센터와 관장실, 3층은 ‘서울아트가이드’ 편집실과 학예실로 쓴다. 국공립·사립 미술관 등에서 각종 기획전을 개최할 때, 이제는 이곳의 실물 자료를 대여해 가곤 한다.
그가 유독 아끼고 직접 챙기는 것은 관장실 안 3개 벽면을 가득 채운 ‘D폴더’다. 백남준, 김환기 등 대표 작가 335명을 다룬 신문, 잡지 기사와 특이 자료를 담은 스크랩북이다. 1850년대생부터 1970년대생 작가까지 시기별로 선별했다. D폴더는 날마다 새로운 자료로 채워진다. 현재 백남준의 스크랩북은 14권, 이중섭과 김환기는 각각 10권, 천경자 9권 등이다. 1974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천경자의 ‘아프리카 풍물화전’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작은 성냥갑이 눈길을 끈다.
김달진은 매일 종이신문 14종을 찾아 읽는다. 기사 원본을 오려 그대로 보존한다. 물론 컴퓨터로 데이터베이스화도 한다. 그는 D폴더의 생명성을 강조한다. D폴더는 살아 있는 생물과도 같다. 끊임없이 보완된다. 활용성이 가장 높은 자료이기도 하다. 해외에서 찾아온 교수나 평론가들이 집필을 위해 열람하기도 하는데, 이들의 방명록은 또 하나의 미술자료로 가치를 갖게 된다. 그의 박물관은 이제 한국 근현대 미술사 자료의 보고로 굳건하게 자리매김했다.
지난 50년간 미술자료 수집·정리·연구·공유를 해 온 김달진은 2011년과 2015년 목척추종양으로 두 차례 큰 수술을 받았다. 긴 세월 양손에 무거운 자료들을 들거나 어깨에 메고 다닌 탓이다. 그렇다고 일을 적당히 한 적은 없다. 2017년에는 왼쪽 회전근개, 지난해 11월에는 오른쪽 회전근개 파열로 또 수술을 받았다. 항상 그의 곁을 지켜 온 아내가 물었다.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거예요?”
거짓말을 못 하는 그가 즉답했다. “내가 죽어야 끝나겠지요.”
바람직한 수집품은 널리 공유하는 과정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만큼 문화는 풍성해진다. 김달진에게 수집은 처음부터 사유를 위한 수집이 아니라 공유의 성격이 짙었다. 그는 여전히 미술 현장을 누비고, 온·오프라인으로 자료를 공유하면서 현재진행형의 삶을 펼쳐 나가고 있다. 지난 3일엔 ‘미술아카이브의 새로운 가치 창조: 수집에서 공유로’라는 주제를 내걸고 리움미술관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의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 김달진의 좌우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