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인 국민의힘이 22대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이 ‘강행’과 ‘대화’의 갈림길에 섰다. 정부가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집단이탈한 전공의들에 대한 행정처분을 절차대로 진행하면서 2000명 증원을 강행할 수 있고, ‘전면 재검토’를 주장하는 의료계 입장을 받아들이고 한발 물러선 상황에서 논의를 이어갈 수도 있다.
이번 총선에서 의사 출신 국회의원이 역대 최대인 8명이나 배출됐는데, 의료계는 “정부 정책에 현장 목소리를 반영할 기회가 늘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다. 대부분 2000명 증원 규모엔 반감이 있어 정부의 의료개혁 동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의료계 “2000명 증원 추진하다 패배”
11일 의료계 등에 따르면 여당 참패로 끝난 총선 이후 의·정 대화도 당분간 잠복기에 접어들 전망이다. 우선 여당 참패에 ‘정권 심판론’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정부의 의료개혁도 한동안 동력을 잃을 것이라는 평가다. 지난달 25일 이후 미뤄둔 집단이탈 전공의 8800여명에 대한 행정처분 절차도 유예기간이 더 늘어날 수 있고, 4월 중 구성키로 한 의료개혁특별위원회 일정도 늦춰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정부는 선거 당일과 이날 의대 증원 관련 브리핑을 하지 않았다.
의료계는 “정부가 무리하게 2000명 증원을 추진하다 총선 패배를 불렀다”며 “증원을 철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한 칼럼에서 “2000명 증원 등 의료개혁도 의료계와 정부간 갈등 장기화로 국민 피로도가 높아지며 정부 심판론에 힘을 싣는 역효과가 난 것”이라며 “여당은 일방적인 의대 증원 정책 추진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직 전공의 류옥하다씨는 “의대 증원 과정에서 보여준 윤석열 정부와 여당의 행태는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보수의 근간을 무너뜨린 일”이라며 “견고한 여당 지지층이던 14만 활동의사와 전공의 및 의대생들, 그 가족들이 돌아섰으며, 우파 지식인들과 전문직들, 환자들 또한 보수를 외면한 것이 지금의 선거 결과”라고 했다.
◆“보수당 몰락 착잡·우울, 민주도 의사편 아냐”
의료계는 그러면서도 보수의 몰락에 착잡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의사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정부를 심판했지만, 의료계는 전통적으로 보수 표로 분류된 상황 때문이다.
‘지민비개’(지역구 민주당, 비례 개혁신당)를 했다는 한 의사는 커뮤니티에 “평생 보수당을 지지했으나, 의사 목에 칼을 겨눈 여당을 지지할 수 없어 처음으로 떨리는 손으로 민주당을 찍었다”며 “독약을 먹느니 썩은 물을 마시는 게 덜 치명적”이라고 썼다.
‘조국사태’ 이후 민주당을 ‘극혐’(극도로 혐오)해왔다는 한 의사는 “투표함 앞에서 투표용지에 손가락을 떼어놓는 순간까지도 ‘국힘을 찍을걸 그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민주당이 이겨 후련하면서도 지지했던 당이 무너져 우울하다”고 했다.
TK 출신으로 부모나 친지 모두 보수당 지지자였다는 의사 역시 “국민의힘이 이번 총선에서 많은 의석수를 가져갔다면 ‘역시 의료개혁이 효과가 있었다’고 자평할까봐 표를 줄 수가 없었다”며 “얼마 전 담화에서 대통령이 고집을 버렸다면,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과의 만남에서 좀 더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다면 국민의힘을 찍었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간호법 제정안을 통과시킨 민주당에도 표를 주긴 힘들었다는 반응도 나왔다.
또 다른 의사는 “여당이 싫지만, 야당도 도저히 찍을 수 없어 백지를 냈다”며 “간호법 단독 상정이 가능한 의석수를 가져간 민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해 걱정이다. 민주당도 결코 의사편은 아닐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국회에서는 민주당 주도의 간호법 제정안이 통과됐으나 대통령 거부권 행사로 폐기됐다. 당시 법안에는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조항이 논란이 됐다. 대한의사협회 등은 “간호사들이 지역사회에서 단독으로 개원을 할 수 있는 법안”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의대 증원을 피해 국힘에 등을 돌렸지만, 지난해 간호법 제정안을 단독 처리한 민주당도 의사 편은 아니라는 것이다.
의료계에선 개혁신당이 급부상한 분위기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당선 소감에서 의대 증원 문제를 언급한 데 대해 고무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아울러 개혁신당이 의료계 인지도가 높은 이주영 전 순천향대 의대 교수를 비례대표 1번에 추천한 것 등을 이유로 개혁신당을 지지하자는 여론이 있었다.
이 대표는 당선 소감에서 “대통령이 천명했던 연금개혁이나 교육개혁, 그리고 의료개혁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사 증원 문제 같은 것들이 굉장히 피상적으로 접근이 됐다”며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해야할 개혁 정책들이 단순히 선거전략처럼 이용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피과 진료 문제에 있어 가장 전문가인 이주영 교수를 공천했다”며 “개혁신당은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에 있어 가장 뛰어난 전문가를 통해 국민들께 맞는 답을 드리려고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의사출신 여·야 4명씩...의대증원 어찌되나
이번 총선에서 의사 출신이 역대 최대인 8명이나 당선되면서 의료개혁 등에 미칠 영향이 관심이다. 여권으론 안철수(국민의힘, 경기 분당갑), 서명옥(국민의힘, 서울 강남갑), 인요한(국민의미래, 비례), 한지아(국민의미래, 비례) 후보가 당선됐다. 범야권에서는 김선민(조국혁신당, 비례), 김윤(더불어민주연합, 비례), 이주영(개혁신당, 비례), 차지호(더불어민주당, 경기 오산) 후보가 당선됐다.
지역구 3명 외에 5명이 비례대표로 국회 입성했다는 것은 각당에서 의료개혁 이슈에 적극 대응할 것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후보들은 대체로 방향성에 동의하나 증원 숫자에 대해선 구체적인 언급을 꺼렸다.
국민의힘 서명옥 당선인은 세계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의대 증원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저도 일부 동의한다”면서도 “하지만 현재 의사들의 입장도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고 했다. 그는 현 상황을 조속히 타개하기 위해서는 ‘국민·의사·정부·여야 협의체’를 통해 대타협을 시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국민의힘 한지아 당선인도 언론 인터뷰에서 증원은 필요하다면서도 구체적인 숫자를 언급하는 일은 피했다. 조국혁신당 김선민 당선인도 마찬가지였다.
◆안철수 “숫자는 마지막”, 김윤 “올해 잠정조정, 내년엔 기구 구성”
국민의힘 안철수 당선인은 11일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나와 “정치에서는 숫자를 먼저 던지면 절대로 안 된다”며 대통령실 방침과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는 “이번 의료개혁 같은 것도, 의사들도 공감하는 내용”이라며 “제대로 법을 정비하고, 그다음에 정부에서 투자를 해야 하고, 그런 것을 하고 나서도 ‘모자란 숫자가 얼마냐’ 이렇게 나갔어야 한다. 숫자는 제일 마지막”이라고 강조했다.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에 큰 힘을 실어왔던 더불어민주연합 김윤 당선인은 이날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의정 갈등이 심한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의 틀에서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무작정 정부가 ‘의사들이 단일안을 가져와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이재명 대표가 제안한 조건없는 사회적 대화 등의 형식을 통해 합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공의, 의대 교수, 의협 등이 함께 대화에 참여해서 우선 내년 정원은 잠정적으로 조정을 좀 하고, 2026학년도 의대 정원부터는 의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정원조정위원회 같은 걸 만들어서 거기 따라 규모를 조정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는 이번 총선에 대해 “민생을 외면하고 개혁에 역주행하는 정권에 대한 심판”이었다면서도 여야가 힘을 합쳐 전공의 집단사직 사태부터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조합은 특히 “국민 생명을 살리는 일에 여야가 따로 없다”며 “총선 직후 긴급 국회를 소집해 장기화하고 있는 의사 진료 거부 사태를 조속히 해결하기 위한 초당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