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저녁, 국립극단 연극 ‘스카팽’을 공연하는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 공연장 안팎의 풍경이 여느 극장과 많이 달랐다. 일찍 온 관객들은 극장 1층 로비에 마련된 태블릿으로 ‘스카팽’ 대본을 미리 읽거나 무대 모형에 설치된 QR코드를 활용해 공연 안내 음성을 들었다. 시각장애인 관객을 배려하듯 점자가 입혀진 공연 소개 전단도 눈에 띄었다. 또 화사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4층 로비 쉼터는 관객 누구나 공연 중에라도 자유롭게 이용했다. 객석 조명은 공연 내내 어둡지 않게 유지돼 배우 등 모두가 주변 관객들의 모습과 표정을 볼 수 있었다.
2019년 첫선을 보이자마자 인기를 끈 ‘스카팽’이 2020년과 2022년에 이어 네 번째 시즌으로 관객과 만나는 올해, 국립극단이 ‘열린 객석’을 표방하며 지난 시즌과 차별화한 결과다.
열린 객석은 장애인과 노약자, 어린이 등 감각 자극에 민감하거나 딱딱한 분위기에서 공연 관람이 어려운 모든 사람을 위해 극장 환경을 개선한 공연을 의미한다. 그래서 ‘스카팽’ 관객들은 공연 중 자유로운 입·퇴장이 가능하고, 소리를 내거나 몸을 뒤척여도 정도가 지나치지 않는 한 제지를 받지 않는다. 심리적 안정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애착 인형 등 평소 아끼는 물품을 들고 관람할 수 있다.
초연부터 주인공 스카팽으로 열연한 이중현은 “마지막 리허설 당시 농인 관객들이 극을 관람하셨을 때 수어로 배우들의 대사에 호응하는 순간 감동했다”고 전했다.
이번 ‘스카팽’의 열린 객석 및 접근성 공연은 문화예술계와 공연계가 작품 자체뿐 아니라 관람 환경의 질도 신경 써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스카팽’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희극 작가 몰리에르(1622∼1673)가 말년에 쓴 ‘스카팽의 간계’(1671)를 국내 신체극의 대가로 꼽히는 임도완이 각색하고 연출했다. 강압적인 부모에 맞서 사랑을 지켜내려는 두 쌍의 연인을 영리한 하인 스카팽이 돕는 이야기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부자인 아르강뜨(문예주·이혜미)와 제롱뜨(이후징)는 아들 옥따브(이호철)와 레앙드르(안창현)가 각각 하류층인 이아상뜨(이다혜)와 제르비네뜨(정다연)와 결혼하려 하자 기를 쓰고 반대한다. 옥따브와 레앙드르가 도움을 요청하자 스카팽은 언제나처럼 해결사로 나선다. 주인 제롱뜨는 물론 아르강뜨를 농락하는 계략을 세워 골탕 먹이고 연인들의 소원을 이뤄 준다. 거짓말이 들통난 스카팽이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이아상뜨와 제르비네뜨가 제롱뜨와 아르강뜨의 친자식이었다는 막장극으로 마무리된다.
임도완은 원작과 달리 몰리에르 역(성원)을 등장시켜 적극 개입시키고, 아르강뜨를 여성(어머니)으로 바꿨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현실과 논란이 됐던 이슈를 삽입해 풍자한다. 제롱뜨와 아르강뜨는 약자를 상대로 갑질을 일삼는 오늘날 권력자와 강자의 전형이다. 지난 시즌 이른바 ‘땅콩 회항’과 학제 개편, 논문 표절 등 당시 주요 이슈를 재치 있게 녹인 임도완은 이번에도 최근 이슈를 비튼 일침을 여기저기 심어 놓았다. 윤석열 대통령의 연구개발 예산 삭감과 이에 항의하는 연구원의 입을 틀어막은 ‘입틀막’ 논란,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주호주대사 임명,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내분이 드러난 ‘탁구 사건’ 등이다. 350년 전 쓰인 막장극임에도 여전히 유효한 고전의 힘이다. 공연은 5월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