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도심에서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차량들이 편의시설로 돌진하거나 신호등을 들이받는 등 각종 사고가 끊이지 않아 시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24일 광주 동부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18일 낮 12시 14분쯤 광주 동구 대인동 한 카페로 승용차가 들이닥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인근 은행원인 A씨는 사고 당시 동료 직원 3명과 함께 점심식사 후 해당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변을 당했다. A씨는 곧바로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지만 이날 오전 사망했다.
운전자 B씨는 경찰에 “차량이 급발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은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했다. 아울러 경찰은 애초 B씨를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치상 혐의로 입건해 사고 경위를 조사했으나, A씨가 사망함에 따라 혐의를 치사상으로 전환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감정을 의뢰했다.
지난 3일에도 경기 용인시 기흥구에서 승용차가 카페 내부로 돌진하는 유사한 사고가 있었다. 이 차량 운전자였던 50대 여성 운전자도 당시 ‘급발진’을 주장했다. 이밖에도 지난 5일엔 경기 고양시, 3일엔 경북 포항시와 대구시, 2일엔 경기 용인시 등에서 급발진 의심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달 24일엔 부산 시내버스가 갑자기 질주하면서 차량 3대를 들이받고 10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기사와 회사측은 급발진을 주장했지만 버스 제조사 측과 경찰은 “(급발진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고 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은 해당 차량의 사고기록장치를 확보해 정밀 분석에 나섰다. 하루 앞선 지난달 23일에는 인천 미추홀구에서 급발진이 의심되는 전기차 택시 사고로 택시에 타고 있던 승객 한 명이 숨졌다.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료에 따르면, 자동차리콜센터에 접수된 급발진 의심 신고는 2018년 39건, 2019년 33건, 2020년 25건, 2021년 39건, 2022년 15건에 이어 지난해 7월까지 18건이 접수됐다. 5년7개월 동안 총 169건에 달한다.
5년간 급발진 의심 사고가 끊이지 않았지만 아직까지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 인정 사례는 0건으로 전무하다.
유종별로는 △경유 53건 △휘발유 52건 △전기 28건 △LPG 18건 △하이브리드 18건 등이었다.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등 전동화 차량의 비중은 27%로, 차량 등록 대수 대비 비중이 컸다. 실제 국과수가 차량 급발진 의심 사고를 조사하는 건수는 2018년 49건, 2019년 58건, 2020년 57건, 2021년 56건, 2022년 76건에 달한다. 지난해에는 8월까지 68건이 추가됐다.
급발진 의심 사고가 끊이지 않으면서 ‘도현이법’에 대한 국민 관심도 커지고 있다. ‘도현이법’은 2022년 12월 6일 강원도 강릉에서 60대 할머니가 운전하던 차량에서 급발진 의심사고가 발생해 함께 타고 있던 손자 이도현군이 사망한 사고를 계기로 개정이 추진되고 있는 법으로, 제품결함에 대한 입증책임이 소비자에게 있는 현행 제조물책임법 규정을 제조자가 입증하도록 전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차량 결함으로 인한 급발진이냐 운전자인 할머니의 과실이냐에 대한 법원의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은 상태다. 법정 공방이 치열한 상황에서 지난 19일 차량 결함에 의한 급발진 여부를 밝힐 ‘재연 시험’이 국내 최초로 진행됐다. 경찰 협조로 이날 오후 1시쯤 강릉 회산동의 아파트 인근에서 열린 재연 시험은 국과수 분석의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해 2018년식 티볼리 에어 차량에 제조사 측이 제공한 변속장치 진단기를 부착해 실시했다.
도현 군의 아버지 이상훈 씨는 “오늘, 이 도로를 도현이가 마지막으로 달렸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사무치고 화도 나면서 소비자가 이렇게까지 무과실을 입증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토로했다. 이어 “대한민국이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살아가지 않도록 21대 국회가 유종의 미를 거뒀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운전자와 제조사 측은 5월 14일 춘천지법 강릉지원에서 진행되는 손해배상 청구 사건 변론기일을 통해 법정 공방을 이어간다.
김필수 대림대학교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세계일보에 “현재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급발진 사고가 발생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차량 결함으로 인정된 사례는 없다”며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재연 시험’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국내 제조물 책임법에 따르면 운전자가 제조물의 결함과 피해를 입증해야 배상을 받을 수 있다. 미국에서는 재판 과정에서 소비자 측의 요구에 따라 차량에 결함이 없다는 것을 제조사가 입증해야 하는 구조다. 제조사는 이를 입증하지 못하면 운전자에 배상을 해야 한다. 또 징벌적 손해배상제로 같은 차량에서 비슷한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할 경우 도로교통안전국(NHTSA) 조사 대상이 된다.
김 교수는 “운전자가 급발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만일의 가능성’을 대비해 운전자는 어떤 대처를 할 수 있을까. 김 교수에 따르면 급발진이 의심되는 차량에서 비슷한 정황 몇 가지가 발견된다.
김 교수는 “갑자기 브레이크가 무력화되면 운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다. 급발진은 몇 초간 굉음이 나거나 머플러(배기가스 배출장치)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전조증상이 나타난다”면서 “사람이 많은 쪽이나 전봇대 등 수직구조물을 피하고 주차된 차량에 박아 충격이 흡수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현재 소비자가 급발진을 규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페달 블랙박스’를 설치하는 것”이라며 “직관적으로 페달에 카메라를 설치해 규명하는 방법뿐이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