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민주화·과학화…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엿보다

한국 지질광물학계 대부 박동길
화학분야 전문 연구가인 리용규
마흔에 생물학 공부 시작 정두현
느타리버섯 인공재배 성공 김삼순
근현대에 명멸한 韓 과학자의 삶
척박한 환경 딛고 남긴 업적 재조명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김근배, 이은경, 선유정/세로북스/4만9000원

 

훗날 한국 지질광물학계의 대부가 된 박동길(1897∼1983)은 1917년 한반도를 떠났다. 때 묻은 한복과 짚신 차림에 주먹밥 다섯 개를 싼 보자기를 둘러멘 채 일본으로 향했다.

그는 충남 천안보통학교를 졸업했지만 형편이 안 돼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대로 농사를 짓느니 일본에서 기술을 배우면 쓸모가 있을 것 같았다. 오사카에 도착해 도요방적 소년공이 됐다. 주야 2교대 12시간을 일했다. 손에 쥐는 돈이 거의 없었다. 잘돼야 직공밖에 못 되겠다 싶었다. 공부를 돌파구로 삼기로 했다. 1918년 간사이상공학교 야간부에 등록했다. 공장 동료, 야간학교 동기 모두 ‘조선인 주제에 공부하다니 건방지다’며 괴롭혔다. 끼니도 잇기 힘들고 잠잘 시간도 부족한 생활이 이어졌다.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다.

근현대 한국 과학자들은 여러 난관 속에서도 뛰어난 연구업적을 내거나 국내 과학 발전의 기반을 다졌다. 왼쪽부터 한국 지질광물학계의 대부 박동길, 대수학의 리 군을 발견한 리림학, 한국 과학자 중 노벨상에 가장 가까이 갔던 이휘소, 위상수학 권위자 권경환. 한국과학기술한림원 과학기술유공자지원센터 제공

이런 힘겨운 싸움 끝에 박동길은 서른 살인 1927년 도호쿠제국대학 이학부에 합격했다. 지질광물학을 전공한 그는 1935년 두만강 모래에서 3㎜ 크기의 천연 다이아몬드를 발견해 주목받았다. ‘극동에는 다이아몬드가 없다’는 도쿄제대 지질학과 교수의 주장을 뒤집은 발견이었다. 1938년 그는 일본지질학회 특별회원이 됐고 6·25전쟁 중이던 1952년 서울대 공대 채광학과 교수진에 합류했다.



박동길처럼 근현대에 명멸한 한국 과학자들의 삶을 전북대 과학학과 김근배·이은경·선유정 교수가 복원했다. 신간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에 자연과학 분야 학자 30명의 일생과 공과를 담았다. 세 교수는 15년 전부터 ‘한국 과학기술 인물열전’ 작업을 시작했다. 총 6권을 기획했고 이번에 첫 결실이 나왔다.

근현대 한국 과학자들은 여러 난관을 뛰어넘어야 했다. 빈곤, 열악한 교육 여건, 전공을 살리기 어려운 일자리, 전무하다시피 한 연구 기반이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이들 중 일부는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나거나 관비 유학생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일부는 어려운 형편을 딛고 운명을 개척했다. 1881년 함흥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리용규는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이민을 떠났다. 미국 여러 주를 돌며 일하다 25살에야 와이머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했다. 12년간 서당을 다닌 그는 이때 근대교육을 처음 받았다.

‘26세로 키 180㎝가 넘고 몸무게 90㎏ 이상’인 그는 초등학교에서 글자를 받아쓸 수 없어 등에서 땀이 흘렀다고 한다. 주립 네브래스카대학에 진학한 건 31세가 돼서였다. 화학 석사학위를 따고 시카고공업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는 화학 석사학위에 전문 연구경력을 쌓은 최초의 조선인이다.

과학자 정두현(1887~미상)의 이력은 특이하다. 1911년 도쿄제대 농학실과에 입학한 그는 귀국 후 숭인학교 교장을 지냈다. 나이 마흔에 돌연 교장직을 그만두고 일본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당시 그는 손자까지 있었다. 공부를 끝내고 돌아와 숭실중학교장이 됐으나 1938년 폐교로 직장을 잃었다.

51살인 그는 다시 대만 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농학, 생물, 의학 세 분야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셈이다. 1941년 졸업한 정두현은 경성제대 의학부를 거쳐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 교편을 잡았다.

학업에 대한 집념은 김삼순(1909~2001) 전 서울여대 교수도 만만치 않다. 김삼순은 느타리버섯의 국내 인공재배에 성공해 느타리버섯을 친근한 식재료로 만든 주인공이다.

전남 담양의 유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여성 차별이 만연한 시대에 맞섰다. 1928년 20세로 결혼 적령기를 넘긴 그는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귀국 후 교사생활을 하다 30세에 다시 대학 진학을 시도했다. 당연히 집안의 반대가 극심했다. 1941년 그는 기어이 32세 만학도로 홋카이도제대 이학부 식물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학위를 시작했으나 해방과 함께 한국에 눌러앉았다. 우여곡절을 거쳐 그가 규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딴 건 1967년 57세 때였다. 한국 여성 최초의 농학박사였다.

김근배, 이은경, 선유정/세로북스/4만9000원

근현대 한국 과학자들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뛰어난 연구업적을 남기거나 국내 과학 발전의 기틀을 닦았다. 리림학(1922∼2005)은 경성제국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면서 수학을 독학했다. 이 대학에 수학과가 없어서다. 훗날 그는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에서 2년 만에 수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대수학의 단순군 분류와 관련해 자신의 이름을 딴 리 군(Ree group)을 발견했다. 프랑스 수학자 장 디외도네는 군론에 근원적으로 공헌한 수학자 21명에 리림학을 포함시켰다.

식민통치와 전쟁, 좌우 대립 등 역사의 파고는 과학자들의 삶을 흔들었다. 정두현은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장에 임명됐지만 1951년부터 소식이 끊겼고 이후 북한에서 완전히 잊힌 인물이 됐다.

쌀 배아로부터 세계 처음으로 비타민E 순수 결정을 얻고 비타민E의 분자식을 제시한 김량하(1901∼미상) 역시 6·25전쟁 중 북으로 갔으나 1950년대 후반부터 자취를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