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리스 커피’와 ‘한국 콩피’ [박영순의 커피 언어]

커피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틀렸다. 아니, 틀리게 됐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커피를 “커피나무의 열매를 볶아서 간 가루”라고 적었다. ‘열매’를 ‘열매의 씨’라고 했어야 옳다는 점을 꼬집는 게 아니다. 그 정도의 모호함은 받아들일 만하다.

문제는 ‘빈리스(Beanless) 커피’가 등장하면서 시작됐다. 2019년 미국 시애틀에서 한 회사가 치커리 뿌리와 버려지는 야자대추 씨, 포도껍질, 해바라기씨 겉껍질 등에서 추출한 성분을 조합해 커피 맛을 낸 제품을 출시했다.

유사랑 화백이 커피추출액을 물감처럼 사용해 ‘빈리스 커피’를 원두가 사라져 가는 이미지로 표현한 작품.

“커피 생두를 쓰지 않았다(Without beans)”는 점을 강조해 제품에 ‘빈리스 커피’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콩 없는 커피’라는 게 ‘팥소 없는 찐빵’과 같은 인상을 준 탓일까? 커피애호가들이 처음에는 소 닭 보듯 했지만, 빈리스 커피가 예상을 깨고 질주하자 커피의 한 장르로 받아들 수 있다는 눈치다.



이 커피는 2022년 미국 주간지 ‘타임’이 선정하는 ‘최고의 발명품 200가지’에 선정됐으며, 지난해 말 ‘원두 없는 에스프레소(beanless espresso)’가 나와 일리노이주의 비고(Vigo), 워싱턴의 허드(Heard), 텍사스의 마드론(Madrone), 매사추세츠의 대니시 페이스트리 하우스(The Danish Pastry House) 등 유명 커피전문점 10개 브랜드의 메뉴에 올랐다.

5000만달러(약 689억원) 투자 유치에 이어 일본의 산토리 홀딩스가 액수를 밝히지 않은 채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다는 보도자료를 내자, 빈리스 커피의 글로벌 유통이 초읽기에 들어간 분위기이다. 맛이 일반 커피에 비해 다소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구환경에 유익하다는 ‘친환경 이슈’를 내세워 지지를 이끌어 내고 있다.

커피나무를 키워 열매를 수확하고 바다 건너 수출해 120㎖ 커피 한 잔을 만드는 데 소비되는 물의 양이 10분 이상 샤워할 수 있는 140ℓ에 달한다. 커피 생두 1㎏을 생산하는 데 발생하는 온실가스는 약 28㎏으로, 자동차 한 대가 100㎞ 운행하면서 공기를 오염시키는 양과 맞먹는다. 반면 빈리스 커피는 나무를 재배하거나 선박을 통한 대량 이송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데다 버려지는 식재료를 재활용할 수 있다.

겨울로 인해 온실 외에서는 커피나무를 키울 수 없는 우리에게 ‘빈리스 커피’가 생산국에 오를 기회가 될 수 있다. 사실 우리도 일찍이 커피콩을 사용하지 않은 ‘대체 커피(Alternative coffee)’를 만들어 마셨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가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을 만들어 100% 수입에 의존하던 커피의 판매를 전면 금지시켰다. 일부 다방은 ‘한미커피’ ‘뉴커피’ ‘대용커피’라는 명칭을 내걸고 커피를 넣지 않은 척했다가 커피를 섞은 사실이 들통나 처벌을 받기도 했다. 당국은 ‘네오’ ‘향정’ ‘녹산’ ‘사자표’ 등 커피가 들어가지 않은 대체커피만을 팔도록 했다. 이 시기에 많은 다방이 민들레뿌리나 오미자, 보리, 밀, 치커리, 도토리, 콩 등을 섞어 만든 ‘한국형 빈리스 커피’를 만들어 팔았다. 이들 커피는 일반 커피와 구분돼 ‘콩피’라고 불렸다. 콩피는 일부 다방이 비싼 커피가루를 아끼기 위해 쓰고 떫은 담배꽁초를 섞은 ‘꽁피’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조상 대대로 여러 약초를 배합해 약을 만들고, 다양한 산채로 맛을 빚어낸 우리의 손기술이 빈리스 커피를 통해 세계 커피 시장을 호령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